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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지도연구원

대전청소년

2021년 여름호
청소년이 힘들 때
국번없이 1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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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테

본문

파란 마음 하얀 마음
김지원
대전도안고등학교 3학년
김지원

나이테

나이테. 나이테는 나무를 가로로 잘랐을 때 보이는 짙은 색의 동심원을 말하며 연륜(年輪)이라고도 한다.
나는 이 단어를 엄마의 손끝에서 처음 떠올렸다.
내가 유치원생일 때였다. 엄마는 나를 거실 바닥에 재워놓고 부엌 식탁에서 가계부를 쓰곤 했다. 그날 나는 엄마와 함께 다음 주 유치원에서 갈 소풍 얘기를 하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러다 눈을 뜬 시간은 유독 조용하고 밝은 밤이었다. 천장으로 넓게 쏟아지는 간이조명의 불빛이 잠을 깨웠다. 몸을 일으키고 엄마를 불렀다. 식탁에서 가계부를 열심히 적고 있던 엄마는 막 일어난 나를 발견하고 놀란 얼굴을 했다. 방금 빛을 본 눈동자가 너무도 따가워서 나는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엄마에게 다가갔다. 어쩌다 깼어? 엄마가 내 엉덩이를 두드려주며 물었다. 나는 내 키보다 큰 식탁 의자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저 얌전히 앉아있자 놀랐던 기색의 엄마도 곧 내게서 관심을 돌렸다. 거실 한쪽에서 곤히 자는 동생의 작은 숨소리, 숫자를 적는 엄마의 볼펜 소리, 그리고 간이조명 아래서 뿜어져 나오는 작은 먼지만이 집을 가득 채웠다. 잠시 후 그 모든 고요를 깬 것은 엄마였다. 우리 땅콩 먹자. 어느새 두꺼운 가계부를 덮고 엄마가 말했다. 엄마는 어리둥절한 얼굴의 나를 데리고 부엌 구석으로 갔다. 작은 비닐봉지 입구를 열자 내 엄지손가락만한 땅콩들이 가득했다. 내가 놀란 얼굴을 하자 엄마가 웃었다. 엄마는 능숙하게 땅콩을 집어 들었다. 딱딱한 껍질이 엄마의 손끝에 닿기만 하면 훌러덩 옷을 벗었다. 나는 고소한 땅콩을 먹으면서 엄마의 손가락에 붙어 있는 동그란 지문들을 구경했다. 단단한 땅콩보다 더 단단한 지문이라니, 신기했다. 그러나 나는 엄마의 지문을 금세 잊어버렸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그래서 기억 속에 파묻히고 마는 나이테라는 단어처럼. 그리고 그런 단어들은 종종 예상치 못한 때에 회자되는 법이다.
두 번째, 내가 나이테를 떠올린 것은 중학생 때였다.
아! 내가 소리를 질렀다. “엄살은.” 엄마가 능청스러운 얼굴로 면봉을 들이밀었다. 진짜 아프다니까. 나는 툴툴대면서 양 손바닥을 내밀었다. 환절기마다 내 지문이 있어야 할 곳은 벌겋게 벗겨졌다. 연고가 묻은 면봉이 손가락에 닿을 때마다 온몸이 찌릿했다. 어릴 때는 안 그러더니, 왜 손가락이 이렇게 벗겨지나 몰라. 엄마는 내 열 손가락 끝이 하얘질 때까지 꼼꼼히 연고를 발랐다. 나는 아픔의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기다리면서 뒤집은 손을 향해 호호 바람을 불었다. 내게서 물러난 엄마는 자리를 옮겨 생호두를 까기 시작했다.
“이러다 지문이 다시 안 생기는 거 아닐까?”
바람공세에 반쯤 투명해진 연고를 바라보며 내가 말했다.
“엄마 손은 완전 튼튼한데 내 손은 아닌가봐. 물렁물렁하고 힘도 없고.”
한참 듣고만 있던 엄마는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내 입에 생호두 하나를 넣어주었다. 나도 어렸을 땐 자주 벗겨졌지, 너처럼. 엄마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엄마는 아랑곳 않고 새로운 호두를 까기 시작했다.
“호두도 땅콩도 못 깠고.”
예상치 못한 엄마의 말에 나는 여전히 놀랐다. 그래서 궁금해졌다. 엄마가 아주 단단한 지문으로 호두며 땅콩을 능숙하게 까게 된 사연이 말이다. 엄마는 나의 궁금증을 듣고 소리 내 웃었다. 너도 자식 낳고 고생해보면 그렇게 될 걸. 그렇게 말하다가 엄마는 다시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어떻게 처음부터 잘했겠어. 엄마 손도 물러터질 만큼 약했는데. 그냥 단단한 걸 만나면 그렇게 돼. 손보다 더 매서운 것들. 그런 것들을 이겨내고 나면 더 튼튼한 지문이 생기는 거지. 그리고 엄마 손은 단단해질 수밖에 없어.”
뒤에 너희들이 있거든. 말을 마친 엄마는 새로 깐 생호두를 다시 내 입에 넣어주었다. 나는 이미 다 투명해진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지문은커녕 빨간 맨살이 여실 없이 드러난 채였다. 지금의 내 손과 마찬가지로 부드럽고 약했을 엄마의 손을 떠올렸다. 옆에서 호두를 문질러 까는 엄마의 손은 거칠고 투박했다.
나는 그날 밤, 거실에 앉아 대야에 남은 생호두를 까기 시작했다. 도구를 사용해서 까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몇 개를 연속으로 까다보니 여린 손끝이 아파왔다. 그러나 견딜 수 있었다. 엄마가 지금껏 나를 등 뒤에 두고 맞닥뜨렸을 장애물들은 더 굳셌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게 새순이 돋아날 준비를 하는 내 맨살 위에, 첫 나이테를 그리는 과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무는 나이테가 많을수록 연륜이 깊다고 말한다. 나는 이미 잔뜩 무거워진 엄마의 두 손에 더 이상의 나이테가 생기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다.
어느새 거실에 나온 엄마가 내게 다가왔다. 나는 열심히 깐 생호두를 엄마의 입에 넣어주었다. 내가 엄마의 손을 잡았다. 엄마가 나를 보며 웃었다. 비싼 선물과 용돈만이 효도의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엄마가 나를 위해 얼마나 많은 나이테를 새겨왔는지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 그리고 옆에서 손을 잡고 남은 시간들을 함께 나아가는 것. 이렇게 손을 맞잡고 웃는 순간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 그 짧은 다짐과 시간들이, 우리 인생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줄 한 그루의 나무가 될 것이다

<제17회 충·효·예 실천우수사례∥고등학교∥우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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