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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지도연구원

대전청소년

2019년 겨울호
청소년이 힘들 때
국번없이 1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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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갖춘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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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글밭
이미숙
이미숙

못갖춘마디

자그마치 25분!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로 이사 온 지 벌써 석 달이 지났다. 높은 데 살다가 낮은 층으로 내려오니 바로 창밖에 작은 숲이 있어서 빗방울 듣는 소리, 새들이 날며 지저귀는 소리, 그리고 나뭇잎 사이로 바람 지나는 소리까지 또렷하게 들린다. 산책로를 따라 간간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것도 즐겁다. 특히 하교 시간이 되면 가방을 빙글빙글 돌리며 뛰어가는 초등학교 아이들을 보면 덩달아 신이 날 때도 있다.
그런데 웬 난데없이 25분인가? 유리창에 햇살 부딪치는 소리 상쾌한 가을 오후, 차를 마시며 물끄러미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데 불쑥 시야에 들어오는 아이 둘이 있었다. 한 아이는 키가 컸고 다른 아이는 작았다. 자매일 것 같기도 하고 키 차이가 조금 나는 초등 고학년 동급생일 것 같기도 했다. 무슨 말인가를 주고받던 아이들이 갑자기 멈추어 섰다. 갑자기 멈추어 서로를 쏘아보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바라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아예 없는 것 같았다.
알 수 없는 적의로 가득 찬 눈길이었다. 자기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취할 수 있는 행동 중 하나일 것이다. 치고받고 싸우지 않는 것이 다행이다 싶었다. 그래도 그렇지, 들판의 곡식들을 잘 여물게 할 이 따스한 가을 햇살 아래 25분은 좀 길지 않나, 지켜보는 내내 괜히 긴장도 되고 한편으로는 귀엽기도 했다. 화해 장면은 놓쳤지만 그 긴 시간을 흘려보낸 후 둘은 별 일 없었던 것처럼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잘 알려진 유머로 북쪽의 김정은이 가장 무서워한다는 대한민국 중학 2학년생, 이제 초등 고학년, 최소한 중학 1학년생으로 내려온 게 아닌가 싶다. 오래 전부터 아이들을 가르쳐오면서 나름 내린 결론이다. 부모나 가르치는 사람으로서는 시키는 대로 잘 따라와 주는 것이 기쁘고 편할 수 있다. 그러나 멀리 보면 반항하고 어른들의 말에 대꾸하면서 자신의 참된 자아를 찾아가는 모습도 나쁘지 않다. 오로지 시키는 대로만 하고 성실하지만 친구와 잘 못 어울리는 아이들이 내 눈에는 더 안쓰러워 보일 때가 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을 읽다 보니, 뱀은 허물을 벗는 동안 앞을 보지 못한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동안 주변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급격한 신체적 변화를 겪게 되면서 당황스러워하고 호르몬의 변화로 감수성이 예민해지기도 쉬워 흔히 ‘질풍노도의 시기’라고도 일컬어지는 청소년기를 나는 이 뱀으로 비유하고 싶다. 지금까지의 허물을 벗고 새로워지는 것이다.
한 번은 현관 밖에서 비명 소리가 나기에 설마 하면서 나가 보았더니 한 아이가 문 앞에 누워 있었다. 다른 아이는 얘를 때려눕히고 계단으로 뛰어 내려가며 또 고성이었다. 주차장에서는 이동하는 차량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탱탱볼을 따라 뛰어다녔다. 스마트 폰으로 게임을 하며 걸어갈 때도 아찔할 때가 많다. 이웃에게 민폐고 위험천만이라 평소에 에티켓을 말해주고 주의를 준다고 했지만 순간순간 내 시야에서 미끄러져 빠져 나간다. 아무렇지도 않게 뭐 어떠냐는 듯 태연하게 응수한다. 커나가는 과정이겠거니 하고 이해하고 돌아설 수밖에.
둘째 아이가 중학 1학년이 되었을 때가 생각난다. 요즘 아이들이 책은 멀리하고 영상이나 게임에 몰두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내 아이 역시 그 과정을 모두 거쳤다. 그래도 집에 있는 책들을 많이 읽는 모습이 보여 안심하고 있던 중에 갑자기 컴퓨터 게임을 시작했다. 늘 집에서 함께 지내니 간섭을 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효과는 거의 없었다. 묘수를 쓴다는 게 아이가 좋아하는 각종 간식을 만들거나 사다가 책상 위에 놓아주었다. “우리 아들, 게임하느라 얼마나 힘드니? 맛있는 간식 먹고 해라.” 처음에는 아주 멋쩍어하면서도 게임을 멈추지는 않았다. 그러나 약 1주일간 매일 좋아하는 간식을 받아먹고 나서 조금씩 시간 조절을 하기에 이르렀다. 성인이 된 지금은 그 때 상황을 돌아보며 서로 웃는다. 친구들이 엄마의 맞대응을 무척 부러워했었다면서.
어른들의 말씀이 맞더라, 라고 마음에서 우러나 인정하기 시작하면서 철이 드는 것 같다. 그들만의 시간에서 몰래 난잡한 동영상을 보든 멍 때리기를 하든, 방학이라고 노랑머리를 하든 사춘기에는 그냥 믿어주고, 야단을 치는 대신 사랑을 듬뿍 주면서 기다려주는 것이 맞다. 우리들의 어린 시절도 되짚어 보면서. 다만, 늘 동정을 살피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전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얼마간의 책임을 지게 하는 것도 좋겠다.
25분! 뱀이 허물을 벗으며 모든 상황에 눈 감고 알고 싶지도 알려고도 하지 않았을 그 정지된 시간, 적막하고 외로웠을 그 시간에 대하여 다시 떠올려 본다. 그리고 문득,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깨어나 날아올랐을 생각의 깊이에 대해. 친구들과 부모 형제들, 모든 사람과 사물들 사이에서 서로 잘 어울리지 못하고 서툴러도 여린박으로 시작해서 세상 속에 섞이어 마지막에는 결국 정박에 이르는 못갖춘마디의 형식으로 한 곡조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라 여기자. 그렇게 우리도 어른으로 자랐을 거니까

기고자 소개

이미숙

시인

2007년『문학마당』으로 등단

<한국작가회의>, <대전작가회의> 회원

<젊은시>동인

<대전윈드오케스트라>단원

<유라시아 문화연대> 회원

시집「피아니스트와 게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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