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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지도연구원

대전청소년

2020년 봄호
청소년이 힘들 때
국번없이 1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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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의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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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글밭
조이섭
조이섭

동물의 왕국

단란한 가족을 보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텔레비전 화면 속, 동부아프리카의 말라위공원에서 십여 마리의 사자 무리가 걸어가고 있다. 암컷 두 마리와 아직 사냥에 나설 수 없는 청년 사자들 뒤를 갓 태어나 걸음마를 하는 여섯 마리 새끼 사자가 졸망졸망 따르고 있다.
무리의 끝에 어린 사자 한 마리가 뒤뚱거리며 따라가고 있다. 새끼 사자 중에서도 덩치가 가장 작다. 새끼들은 어미와 이모가 양육하는데 젖꼭지가 4개뿐이다. 새끼들의 젖꼭지 쟁탈이 치열하다. 막내 사자는 태아 때부터 영양공급을 제대로 못 받아 작게 태어난 것 같다. 막내는 번번이 형제들에게 치여 엄마 주위에 서성대다가 어미가 수유를 마치고 일어나 가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형제들과 놀이에도 끼이지 못한다. 형제들이 달리고 뒤엉켜 뒹굴 때도 관심을 보이며 다가서다 부딪혀 나가떨어지기 일쑤다. 형제들이 활발하게 노는 것을 멀찍이 떨어져서 바라보거나 나무뿌리를 잡고 혼자 놀기 명수가 되어 버렸다.
밤이 되자, 어미와 이모 사자가 새끼들을 남겨두고 사냥을 나간다. 새끼 사자들은 겁에 질려 눈치만 보며 한 군데 몰려 있다. 이때 표범과 하이에나가 주위에 나타나자 아직 사냥에 참가하지 못하는 청년 수사자들은 사냥 본능에 울부짖으며 이리저리 뛰기 시작한다. 이 와중에 새끼들은 뿔뿔이 흩어져 숨는다.
새벽이 되어 돌아온 어미 사자는 새끼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 낮게 포효한다. 청년 사자들이 하나둘 돌아오는데 어린 새끼들은 보이지 않는다. 어미와 이모가 근처를 돌아다니며 새끼를 하나씩 불러 모은다. 막내는 끝내 보이지 않는다. 어미는 하는 수 없이 남아있는 새끼들을 수습하여 근거지로 돌아간다.
막내는 용케도 지난밤의 혼란 속에서도 덤불 아래 숨어 있다가 비틀거리며 초원으로 걸어 나온다. 원래 약해 빠진 데다 혼자 남은 두려움에 발걸음이 무겁다. 종일 걸어가다가 다시 밤을 맞았다. 표범 한 마리가 키 작은 풀밭에 웅크리고 앉아 벌벌 떨고 있는 막내를 주시하고 있다. 일촉즉발의 순간에 하마가 표범과 막내 사이에 끼어들어 풀을 뜯는 사이 표범이 물러나고 만다. 날이 밝자 운 좋게 고비를 넘긴 막내는 터벅터벅 어미를 찾아 길을 나선다.
천신만고 끝에 가까스로 무리를 만난 막내는 배가 고파 엄마의 젖을 찾아 파고든다. 어미가 벌떡 일어나 자리를 피한다. 크기도 작고 털에 윤기 하나 없이 부스스하고 비틀거리는 새끼를 포기하고 젖 물리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모도 마찬가지다. 사자는 절벽에서 새끼들을 밀어 떨어뜨려 제힘으로 올라오는 녀석들만 키운다더니 어차피 안 될 약해 빠진 막내를 포기한 모양이다. 빈 젖꼭지가 생겨서 막내가 가까이 가면 다른 새끼들이 젖을 빨고 있어도 자리를 피한다. 젖을 먹지 못한 막내는 탈수증이 심해져 한쪽 방향으로만 비틀거리다가 급기야 제자리를 맴돈다. 막내에게 생사가 달린 심각한 시련이 닥친 것이다.
사자 무리가 언덕 위에서 가파른 경사를 따라 내려가 개울로 간다. 어미와 새끼들이 물을 마시고 모래톱에 누워 쉬고 있다. 막내는 식구 뒤를 따라가다가 놓치고 만다. 식구들이 내려간 경사진 길을 찾지 못한 막내는 절벽 위에서 헤매다가 개울가에 있는 무리를 발견하고 비틀거리며 한 발 한 발 내려가기 시작한다. 건강한 새끼도 제대로 내려가기 어려울 만큼 급경사를 벌벌 떨며 내려간다. 바닥까지 일 미터 정도를 남기고 발 디딜 곳이 없다.
제 자리에서 낑낑거리고 있는 막내를 본 어미가 마중을 나간다. 어미가 조심스레 막내의 머리를 물고 돌아와 바닥에 내려놓는다. 숨이 가빠 헐떡이는 막내에게 젖을 내민다. 막내의 살려고 하는 의지를 높게 산 어미가 막내를 다시 새끼로 인정한 것이다. 형제들도 어미의 젖꼭지를 빼앗으러 오지 않아 막내는 닷새 만에 처음으로 젖을 문다.
휴식을 취한 무리는 다시 길을 떠난다. 쇠약한 막내도 무리의 꽁무니에서 부지런히 따라간다. 그러나 너무나 약해진 체력으로 무리를 따르기는 역부족이다. 점점 무리와 거리가 벌어지기 시작한다. 또다시 위기가 닥친 것이다. 밤 사냥 때는 무리를 잃어버렸고, 어미에게 버림받아 젖꼭지를 물지 못한 다음의 세 번째 위기다.
거리가 점점 벌어지는 순간, 무리의 꽁무니를 따르던 새끼 한 마리가 제자리에 멈춰 선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 모습이 막내를 기다리는 것 같다. 그러자 앞서가던 형제 사자도 멈춘다. 마침내 선두에서 걷던 어미와 이모도 제자리에 서서 막내가 오기를 기다린다. 모든 식구가 약한 막내를 식구로 인정하고 함께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막내는 비틀거리며, 그러나 힘을 내어 종종걸음을 친다. 무리는 하나가 되어 서서히 화면 저편으로 걸어간다.
막내사자가 건강한 성체로 자라기를 바라면서 채널을 돌려보니 들리는 소식들이 참담하다. 자기 아들딸에게 행해지는 학대와 무관심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짐승보다 못한 인간'에게 이 동물의 왕국 한 편을 보여주고 싶다

기고자 소개

조이섭

계간 『수필세계』 신인상 등단 (2016)

매일신문 시니어문학상 수상(2018)

수필집 『미조 迷鳥』, 『나미비아의 풍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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