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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지도연구원

대전청소년

2021년 가을호
청소년이 힘들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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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위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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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글밭
고영옥
고영옥

가위잠

아이들이 풀잎을 물고 버티고 있다. 숨소리만 간간이 들린다. 돈을 훔쳐간 사람의 풀잎이 변한다는 선생님의 말에 아이들은 신경을 곤두세운다. 자신이 물고 있는 풀잎의 길이가 도둑을 점친다는 생각에 사뭇 떨고 있다.
아이들의 가방을 뒤져서 돈을 가져가는 소동이 반복해서 일어나고 있다. 가방과 책상 속을 검사해 보지만, 감쪽같아서 찾을 길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시도해 보는 중이다. 풀잎을 물고 있는 아이 중에 슬슬 옆 사람의 눈치를 살피는 아이가 있다. 길쭉했던 풀잎이 입속으로 들어갈 만큼 짧아진다. 부리나케 교실 뒷문으로 나간다. 유심히 살펴보니 화장실에 갔다가 교실로 들어온다. 평소에 모범생인 이 아이를 의심하기가 싫다.
쉬는 시간에 아이들을 밖으로 보내고 난 후 화장실을 둘러본다. 쓰레기통에 던진 돈을 주섬주섬 주우면서 눈물이 난다. 오른팔처럼 내 일을 도왔던 아이다. 친구에게도 친절해서 인기가 많은 아이가 남의 돈에 손을 대었다. 집안 사정이 어렵거나 부모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텅 빈 교실에 그 아이와 마주 앉는다.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손을 만지작거리며 손톱만 애꿎게 물어뜯고 있다. 너는 무엇이 부족해서 남의 돈을 훔쳤느냐고 닦달해야 한다. 배신감에 채찍질이라도 하며 잘못을 용서받아야 한다. 그런데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목젖이 젖는다. 내 어린 시절이 필름처럼 스치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파도소리를 들으면서 자랐다. 바닷가에 사는 나의 구경거리는 여름날 많은 사람을 보는 것이다. 여름철 캠핑 온 사람들의 멋진 선글라스와 고급스러운 옷, 그리고 꽃무늬의 슬리퍼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부러웠다. 나도 이 사람들처럼 선글라스를 쓰고 멋진 옷을 입고 돌아다니고 싶었다.
 그 날도 친구들과 물장구를 치며 바닷가에서 놀고 있었다. 물놀이 온 사람들은 모두가 넓은 챙이 있는 모자를 쓰고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그 중에 돋보이는 사람이 있었다. 빨간색 핫팬츠에 멋진 벨트로 허리를 감싸고 있는 모습은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아름답다. 벨트는 고운 무늬의 블라우스를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저런 벨트가 있으면 나도 멋진 여자가 될 텐데.'라고 생각하니, 돈이 없는 우리 집이 미웠다. 멋을 부리고 싶은 아홉 살의 나는 그 여자로부터 눈을 떼지 못했다. 잠시 후 아름다운 수영복 차림으로 물속으로 들어가지 않는가!
함께 놀던 친구들을 따돌리고 그 사람의 짐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벨트 끝에 박힌 보석이 눈이 부시도록 블라우스 위에서 빛을 토해내고 있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얼른 옆구리에 벨트를 끼고 도망쳤다. 무거워진 다리와 텅텅 내려앉는 가슴을 붙들고 겨우 집까지 왔다. 그 사람이 쫓아올까 봐 허리에 한번 둘러보지도 못하고 벨트를 농짝 깊숙이 꼭꼭 숨겼다.
그날따라 어머니께서 이웃집에 갔다. 기다리다가 잠이 들었다. 갑자기 누군가 목을 조이며 달려들었다. 목을 감고 있는 거머리 같은 손을 겨우 떼고 달렸다. 아무리 달려도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도둑놈, 게 섰거라!”며 누군가 쫓아왔다. 금방이라도 목을 휘어잡을 것 같은 보이지 않는 손이 점점 몸을 조였다. 소리를 지르며 떨어지지 않는 발로 달렸다. 얼마나 용을 썼는지 땀으로 옷이 흠뻑 젖었다. 가위잠에서 풀려나 겨우 눈을 떠보니 어머니께서 안쓰러운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내 앞에서 손톱을 깨물며 떨고 있는 아이의 마음을 안다. 입술이 마르고 가슴이 타는 이 아이의 두려움을 안다. 마주 잡은 아이의 손이 따뜻하다. 아이의 고운 온기가 전해 온다. 옷소매로 눈물을 문지르며 친구들과 엄마에게는 비밀로 해 달라는 아이의 눈빛이 파랗다. 아마 오늘 저녁 목이 조이는 가위잠에 시달릴지도 모른다. 이런 홍역을 치루고 나면 이 아이도 평생 양심이 반듯한 아이로 태어나지 않을까

기고자 소개

고영옥

《수필과비평》 신인상 등단, 한국에세이포럼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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