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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청소년

2020년 겨울호
청소년이 힘들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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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는 잠시 잊어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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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글밭
가기천
가기천

공부는 잠시 잊어도 괜찮아

푸른빛으로 가득했던 교정이 짙은 가을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몇 년째 중학생들에게 인성, 진로상담 하느라 드나들다보니 학교 곳곳이 눈에 익었다. 활기차게 뛰고 마음껏 떠드는 학생들의 모습에서 밝은 내일을 보았다. 싱싱한 에너지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곤 했다. 밝은 표정으로 맞아주는 인사와 상담시간에 마주했던 학생의 살가운 미소는 학교를 찾는 발걸음을 가볍게 해주었다. 짧은 시간 맺은 인연의 고리가 끈끈하게 이어지는 푸근한 현장이었다. 학년 초에 시작한 봉사활동을 마무리하는 늦가을 쯤 되면 그 사이 부쩍 성장하고 의젓해진 모습이 보였다.
오랜 직장 생활을 마치고 정작 손에서 일을 놓고 보니 갑자기 ‘공중에 뜬 사람’이라는 느낌이었다. 문득, ‘이제 시간을 좀 더 쓸모 있게 보내야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교육원, 도서관, 문화원을 부지런히 찾아다녔다. 딱히 쓰임새보다는 목표를 정해야 게을러지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서 효지도사, 심리상담사를 비롯하여 여러 개의 자격증을 땄다. 그러나 왠지 모자란 ‘무엇’이 있었으니 바로 봉사활동이었다. 꿈은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마침 어느 문화재단에서 ‘재능기부’ 희망자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신청했다. 드디어 학생상담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었다.
서슴없이 나서기는 했지만 과연 학생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자칫 어긋나는 인식을 심어주지는 않을까하는 염려가 없지 않았다. 조바심이 일었지만 진심을 담아 이야기를 해주면 될 것이라는 마음으로 이런 걱정들을 덮었다. 첫 날, 달뜬 마음으로 학교에 갔다. 진로담당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학생들과 마주 앉았다.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주자, 눈높이를 맞추며 공감해 주자, 비록 엉뚱한 말이라도 기발하다며 추임새를 넣어주자’고 다짐했다. 딴 짓을 하면 하는 대로 받아주며 시간을 함께 하기로 했다. 잠시 상담시간만이라도 ‘공부’라는 말에서 멀어지게 해주고 싶었다. 어쩌면 그것은 다른 방식의 공부라는 생각이었다.
낯선 사람을 처음 마주하는 눈빛은 티 없이 맑고 순수했다. 머뭇거림은 없고 호기심이 가득 들어있었다. 무겁고 교훈적인 ‘어르신 말씀’은 되도록 삼갔다. “오늘 기분은 어때?”, “아침에 늦잠자서 뛰지 않았어?” 가볍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학생들은 귀를 쫑긋하며 들었다. 질문도 이어졌다. 옆 친구와 장난을 치는 학생도 없지 않았다. 그 조차도 미쁘게 받아들였다. 이야기 가운데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좋은 친구를 사귀고 혹시 잘못하더라도 덮어주자. 외국어 하나쯤은 능숙하게 할 수 있도록 하면 좋겠다. 세계지도를 펴 놓고 낯 선 나라도 찾아보며 시야를 넓히라는 말을 해주었다. 깜짝 놀랄 만큼 똑똑하고 당돌하다할 정도로 야무진 학생이 있었다. 한 학생은 상담이 끝나자 들고 간 자료집을 달라고 했다. 대담한 용기가 갸륵했다. 하다보면 마치는 벨소리를 놓칠 만큼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어느 날이었다. 한 여학생이 해맑은 표정으로 “선생님, 이것 좀 드세요”하며 작은 쇼핑백을 내밀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순간 당황하면서 “이게 뭔데?”하고 물으니, 집에서 만든 쿠키라고 했다. 그냥 받기가 좀 망설여졌다. 하여 가방 안을 살펴보니 다행히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기념볼펜이 있었다. “나는 준비한 게 없는데…, 이거라도 줄게”하며 들려줬다. 상담이 끝나고 함께 활동하는 분들과 모인 자리에서 쿠키를 꺼내놓고 즉석다과회를 열었다. 분위기는 훈훈했고 웃음 속에 나누는 이야기에는 보람과 흐뭇함이 배어났다. 그 뒤 서점에 들러 중학생이 읽으면 좋을 책을 골랐다. 책에 「큰 꿈을 품고 곱게 가꾸어 활짝 피우기 바랍니다.」라고 쓴 메모를 붙였다. 다음 날, 선생님을 뵙고 그 학생에게 전해달라고 부탁드렸다.
나이가 많다거나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고 하여 반드시 옳다는 것은 그릇된 판단이다. 일방적으로 무엇을 가르친다는 것도 맞지 않는다. 학생들 스스로 터득하게 하는데 작으나마 계기를 준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생각이었다. 요즘 학생들이 좋아하는 것, 고민하는 것은 무엇인지 알게 되는 소득도 있었다. 짧은 시간의 만남이 서로에게 한 편의 추억이 되리라는 기대도 걸었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품성이 좋아지고 학습하는 태도가 달라졌다’고 평가해줬다. 이런 찬사에 보람과 자부심을 얻었고 의욕이 부풀었다.
가뿐한 걸음으로 교문에 들어설 때 곱게 물든 단풍에 눈길이 멈췄다. 봄, 여름에는 하나처럼 푸르렀던 나뭇잎들이 지금은 제각각 다른 빛깔로 물들었다. 알맞게 내리는 비, 따뜻한 햇볕, 부드러운 바람, 때로는 사나운 폭풍우가 뒤섞여 고운 색깔을 만들었다. 학생들도 훗날 이런 모습일 듯싶었다. 배움, 도전, 이룸의 길에서 겪게 될 사연들을 헤쳐 나가며 사람들의 숲에서 나름 자기의 빛을 낼 것이라는 믿음을 가득 품었다. 그것은 학생들로부터 찾은 희망이었다

기고자 소개

가기천(賈基天)

수필가 : 한국문인협회, 대전문인협회, 대전수필문학회 회원

칼럼니스트 : 중도일보, 디트뉴스 24, 서산타임즈에 고정 칼럼니스트 외

전, 서산시 부시장 · 연기군 부군수 역임

저서 : 『사탕의 용도』, 『스산을 보고 서산을 쓰다』 (2인 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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