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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지도연구원

대전청소년

2021년 여름호
청소년이 힘들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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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에 대하여

본문

선생님 글밭
박기옥
박기옥

발에 대하여

방송을 보니 미수(88세)를 맞은 할머니가 중환자실에 있는 남편을 위해 발장갑을 뜨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 남편의 발이 하루하루 차가워져 가는 것이 안타까워 뜨개질을 시작했다고 한다.
할머니의 연세 또한 가볍지 않으신데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주름 가득한 얼굴에 돋보기를 걸치고 남편을 위해 한 코씩 힘들게 뜨개질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짠하다.
에스키모인들의 풍습 하나를 떠올린다. 그들의 신발은 장화이다. 추운 지방에서 발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그 폐쇄성 신발은 발목을 감싸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해변이나 빙설(氷雪), 진흙, 모래땅에서 매몰되거나 미끄러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만든 장화라 벗기가 불편하다.
일터에서 돌아온 남편의 발을 장화 속에서 뽑아내는 것은 아내의 몫이다. 하루 종일 빙하의 날씨에 혹사당한 발은 얼었다 녹기를 되풀이하는 동안 물 먹은 나무토막이 되어 있다. 아내는 장화에서 힘들게 뽑은 발을 씻기고 닦아서 가슴에 품는다. 남편의 편안한 휴식을 위해 자신의 체온으로 발을 덥혀주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발에 얽힌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 10여 년 전, 23개 언어로 발행되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은 16세기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신발 한 켤레를 소개했다. 경북 안동에서 택지를 개발하기 위해 선조의 묘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남자 미이라와 함께 머리카락으로 삼은 신발 한 켤레가 발굴된 것이다.
남편이 요절하자 아내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내어 신발 한 켤레를 삼아 관속에 넣었다. 지금의 평등사회에 비춰볼 때 과연 여인에게 그토록 헌신적인 사랑을 강조하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는 별도로 치자. 문제는 사랑의 징표로서 머리카락으로 신발을 삼았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왜 하필 신발을 만들었을까.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있는 남편을 두고 그녀는 왜 유독 남편의 발을 걱정한 것일까.
이 사실을 철학적 혹은 상징적으로 접근하고 싶어 하지만 나는 반대다. 사랑은 그렇게 복잡하거나 모호한 것이 아니다. 사랑은 보다 단순하고 구체적이다. 인간은 몸이 편치 않으면 발이 편치 못하고, 발이 편치 못하면 편한 휴식을 이룰 수가 없게 되어 있다. 발은 신체의 온갖 경락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녀는 남편의 투병 중에서도 발을 다스렸으리라 짐작한다. 주무르기도 하고 쓰다듬기도 하고 부비기도 하고 품기도 하고 간간히 지그시 눌러 막힌 혈을 통하게도 했으리라. 남편은 아내의 손에 의해 잠시나마 병마의 고통에서 벗어나 편안한 잠에 빠져들곤 했을 것이다. 죽어서도 함께 묻은 신발을 아내의 손길로 알고 편히 영면하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지난겨울, 비행기 안에서 재미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영어가 짧은 내가 어렴풋이 알아듣기로 한국의 신랑과 필리핀 신부인 듯하였다. 결혼 초기인 듯 신랑은 영어를 모르고, 신부는 한국말이 서툴렀다. 필리핀 신부가 영어로 ‘다다다’ 불평을 말하면 한국 신랑이 내용을 짐작하여 ‘웅얼웅얼’ 한국말로 달래는 식이었다. 신부의 영어는 신랑에게 통하지 않고, 신랑의 한국어는 신부를 설득하지 못했다. 두 사람 모두 대화가 되지 않는 상태에서 결국은 한숨 쉬는 순간이 여러 번 반복되었다.
신부가 지친 듯 눈을 감고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신랑이 조용히 신부의 구두를 벗겼다. 자신의 무릎 위에 신부의 발을 올려놓더니 천천히, 발 지압을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모른 척 잠을 청하는 신부나 발 지압에 몰두해 있는 신랑에게 더 이상 말은 필요치 않아 보였다.
발은 신체의 마지막이다. 얼굴에 앞서 발부터 먼저 씻는 사람도 없을 뿐 아니라 낯 선 사람과 인사할 때도 손을 내밀지 발부터 먼저 내는 풍습은 없다. 피곤한 발을 남에게 맡길 수는 있지만 어려운 자리에 맨발을 함부로 내놓아서는 안 된다. 언제나 묵묵히 가장 낮은 곳에서 몸의 무게를 감당하고 이동하는 수고를 담당하는 것이 발이다. 예수가 제자의 발에 입 맞추는 것도 당신의 낮은 곳을 경애한다는 뜻이 아니던가.
이제 누구든 만나면 발의 안부도 좀 물었으면 좋겠다.
“잘 지내시죠? 당신의 발도 편안하신가요?”
나의 발도 나 스스로 경외심을 갖고 다스려야겠다. 경락마다 문안 인사하듯 아침, 저녁 꾹꾹 눌러주고, 부비고 주무르고 두드려서 발바닥까지 시원하게 풀어 주리라. 밤이면 따뜻한 물에 발을 담그고 하루의 수고에 대해 경의를 표하리라.
그나저나 방송에 나오는 미수의 할머니의 발은 어떻게 할까. 차가워지는 할아버지의 발을 위해 뜨개질에 몰두하고 있는 저 할머니의 메마른 발은 누가 있어 피가 돌게 만져드릴까

기고자 소개

박기옥

수필가, 《한국수필》 등단,

대구수필가협회 회장

수필집 『아무도 모른다』, 『커피 칸타타』 외

서정주 문학상 수상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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