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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지도연구원

대전청소년

2021년 겨울호
청소년이 힘들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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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 영웅 김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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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글밭
최중호
최중호

철도 영웅 김재현

경부선 철길 가엔 황갈색으로 된 순직비(殉職碑)가 하나 있다. 판암과 세천 사이 낮은 산 아래에 있는 기관사 순직비. 한 기관사의 영혼이 깃든 순직비는 그곳에 서서 대전으로 오는 길손은 반갑게 맞고, 가는 길손은 아쉬움으로 배웅한다. 자신의 목숨을 바쳐 지키려 했던 대전이었기 때문이다.
비는 앞면과 뒷면이 같은 내용으로 새겨져 있다. 하지만 달리는 열차에선 비에 새겨진 글씨를 읽을 수 없다.
이야기는 세월을 거슬러 1950년 한국전쟁으로 들어가 본다.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남침으로 국군은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포기하고 후퇴를 거듭하였다. 이에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 제24보병사단이 한국으로 이동해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려 했지만, 전력(戰力)의 약세로 무참히 패하고 말았다. 그 후,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려던 금강방어선마저 무너지자 국군과 미군은 대전으로 집결하게 되었다.
7월 18일, 미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이 대전을 방문했다. 그는 미 제24사단장인 윌리엄 F. 딘(William F. Dean)* 소장을 만나 포항으로 상륙 예정인 미군 병력이 충북 영동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7월 20일까지 대전을 지켜줄 것을 명령한다. 이에 딘 소장은 그동안의 전투로 많은 전력이 손실된 상태에서 대전을 방어하게 되었다.
7월 19일, 새벽부터 북한군의 공격이 시작되었고, 대전 시내에 있던 국군과 미군은 이미 북한군에게 포위된 상태였다. 따라서 딘 소장은 선발대를 사단 본부가 있는 영동으로 출발시킨 후, 사단 본부에 전화를 했다. 기관차를 대전역으로 보내 화물차 10량에 실려 있는 탄약과 보급품을 영동으로 실어 갈 것을 명령했다.
북한군의 공격을 받은 국군과 미군은 영동으로 가기 위해 차량을 버리고 흩어져서 옥천 쪽으로 빠져나갔다. 딘 소장도 부관과 함께 지프를 타고 북한군의 공격을 피해 옥천으로 간다는 것이 방향을 잘못 잡아 금산 쪽으로 들어서고 말았다. 그는 금산 쪽으로 가다 산내 부근에서 북한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차를 버리고 인근에 있는 산으로 탈출하였다. 이때 함께 탈출하던 부상병이 산속에서 물을 달라고 하자, 그는 물을 떠다 주려고 계곡으로 내려가다 그만 절벽에서 굴러떨어져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곳에서 그는 일행과 떨어져 홀로 남게 되었다.
영동으로 후퇴한 국군과 미군은 딘 소장이 아직 대전에서 탈출하지 못한 것을 알았다. 큰일이었다. 그는 많은 군사 기밀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북한군에게 잡힌다면 전쟁은 아군에게 불리할 수도 있었다. 그를 먼저 구출한 후 대전역에 있는 탄약과 보급품을 후방으로 실어 와야 했다.
영동에서 대전으로 가는 도로는 폭격으로 인해 차량 통행이 불편했다. 그래 기차를 이용해서 딘 소장을 구출한 후, 보급품을 실어 오기로 하였다. 우선 작전 수행을 위해 미 특공대원 33명을 선발하였다. 문제는 기관차를 운전할 기관사가 없었다. 기관사를 선발해야 했다. 하지만 누가 목숨을 걸고 기관차를 운전해 적진으로 달려갈 것인가? 기관사들은 서로 눈치만 볼 뿐 누구도 운전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한 젊은 청년이 기관차를 운전하겠다고 나섰다.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이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27세의 김재현 기관사였다. 그의 눈빛은 맹렬하게 빛났다. 어떤 결정을 할 때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강렬한 눈빛이었다. 이어 또 다른 두 청년이 대전으로 가겠다고 나섰다. 황남호와 현재영 보조 기관사였다.
이렇게 해서 딘 소장을 구출 작전에 특공대원 33명과 기관사 3명이 영동역에 집결하였다. 그들은 미카 3-129 기관차에 석탄차와 화차 1량을 연결한 후, 전속력으로 대전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지나는 철길마다 적막한 전운(戰雲)이 흐를 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기관차가 세천역을 지날 땐 역 건물은 이미 파손되어 불안감을 더해만 갔다. 초조한 마음으로 세천 터널을 빠져나올 무렵 북한군의 총탄이 빗발치기 시작했다. 미군 특공대원들도 일제히 기관총으로 대응 사격을 했다.
치열한 총격전에서 특공대원 10여 명이 북한군의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숨 막히는 혈전을 계속하며 기관차가 대전역에 도착했을 때, 시가지에는 많은 건물이 불타고 있었다. 그들은 딘 소장을 찾기 위해 1시간여 동안 대전역 주변을 수색했으나, 딘 소장을 찾을 수 없었다. 이미 북한군에게 점령된 대전 시내에서 딘 소장을 찾는다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었다. 그들은 더 이상 그곳에서 머물 수가 없어 후퇴하기로 결정하였다.
대전역을 출발한 기관차가 영동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북한군은 판암동 산기슭에서 특공대원들이 철수하기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기관차가 판암동 산기슭을 지날 무렵 북한군은 다시 집중 사격을 가해왔다. 특공대원들도 이에 대응 사격을 했으나, 우수한 화력을 갖고 있던 북한군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었다. 여기서 김재현 기관사가 8발의 총탄을 맞고 쓰러졌고, 특공대원들도 부상병 1명만 남고 모두 전사했다. 현재영 보조 기관사가 기관차를 운전했으나 그도 왼팔에 관통상을 입고 쓰러졌다. 이때 화차에 석탄을 퍼 넣고 있던 황남호 보조기관사가 재빨리 운전석에 앉아 운전을 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간신히 적진을 탈출하여 옥천역까지 오게 되었다.
마침 옥천역에는 미군 야전병원 열차가 마지막 철수 병력을 싣고 가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이 열차에 김재현 기관사를 포함한 사망자 33명, 부상자 2명, 그리고 생존자 1명을 싣고 영동으로 출발했다. 총 36명이 참여한 딘 소장 구출 작전에서 33명이 사망하였고, 부상자를 포함해 3명만이 살아서 돌아왔다.
기관차가 영동역에 도착하자 기관사 동료들이 그곳에서 김재현 기관사의 장례를 치른 후, 그의 시신을 영동산 아래에 묻어주었다. 전쟁이 끝난 후, 그의 유해는 고향 뒷산에 이장했다가, 1983년 10월 28일 국립서울현충원 장교묘역으로 안장하였다. 민간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장교묘역에 안장된 것이다.
이렇게 김재현 기관사는 목숨을 바쳐 딘 소장을 구출하려고 하였다. 그 후, 1962년 12월 5일 대전철도국 직원들이 그의 나라 사랑 정신과 투철한 사명감을 보전하기 위해, 그가 순직한 경부선 철길 가에 순직비를 세워 놓았던 것이다.
기관사 김재현. 그는 젊은 나이에 갔지만, 자랑스러운 철도 영웅이 되어 철도인들의 가슴 속에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윌리엄 F. 딘(William F. Dean) : 대전 근교에서 낙오된 딘 소장은 36일간 산속을 헤매다가 진안에서 한 농부의 신고로 북한군 포로가 된 후, 전쟁이 끝나고 포로 교환으로 돌아왔다.

기고자 소개

최중호

수필문학 등단

한국문인협회 이사, 한국수필가협회 이사, 대전문인협회 부회장, 대전·충남수필문학회 회장 역임

대전광역시교육청 장학사, 장학관, 교감, 교장 역임

한국수필문학상, 박종화문학상, 수필문학상, 인산기행수필문학상 외 다수

수필집 『장경각에 핀 연꽃』, 『한국인의 두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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