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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지도연구원

대전청소년

2019년 겨울호
청소년이 힘들 때
국번없이 1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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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과 그리움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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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과 함께
이경자
이경자

슬픔과 그리움의 빛

내 나이 열 살 쯤 되었을 때였지 싶다. 그때 나는 시간만 나면 집 앞에 있는 개울가로 나갔다. 개울가의 돌들은 긴 세월동안 물에 씻기고 햇볕에 쬐여 희고 고왔다. 자갈로 된 돌 위에는 누군가가 누런 광목천을 바래기 위해 널어놓았다. 광목은 물에 몇 십 번이고 적셔져 맑은 돌 위에서 햇볕을 받아 여름에서 늦은 가을까지 바래고 또 바래어졌다. 그 사이 빨간 고추잠자리들이 눈부시게 흰 천 위로 내려앉았다 올랐다 했다. 바래어진 광목천들의 행렬을 보면 희다 못해 푸른빛이 돌았다. 그 빛은 슬픔 같기도 하고 그리움 같기도 했다. 내가 가을 햇빛이 아름답다고 처음으로 느낀 것이 바로 그때였다.
가을빛이 더 가슴에 각인된 것은 초등학교 5학년쯤이지 싶다. 추석이 막 지난 후 학교에 갔을 때였다. 교실에서 유리창 너머로 학교 뒤편에 있는 봉화산을 보았다. 공부는 뒷전이고 눈이 자꾸만 그 산으로 향했다. 산은 점점 크게 나에게 다가왔고 가슴이 울렁거렸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산으로 올라갔다. 숨이 턱에  닫도록 오르고 또 올라 산 정상에 섰다. 그곳에 서서 위로 쳐다보니 무한히 넓은 푸른 하늘만 눈에 들어왔다. 겨우 열한 살 나이에 느꼈던 산 정상에서의 그 막막함, 바람 부는 산꼭대기에서 아득하고 망망한 푸른 하늘과 청량한 그 빛이 무엇이었는지 그때는 미처 몰랐다. 그 후 얼마나 긴 세월이 흘렀을까. 죽자고 일을 할 때였다. 어느 날 마당의 작은 꽃밭에 붉게 타는 듯한 사르비아 꽃과 그 위에 내려쬐는 가을 햇빛이 나를 슬프고도 눈물 나게 했다. 왜 그렇게 아름다움의 극점에 다다랐을 때 슬픔과 함께 눈물이 나는지.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기쁨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노여움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즐거움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사랑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욕심이 사무치면 울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면 나 역시 아름다움에서 눈물이 나는 모양이다. 
이 가을, 동래 범어사에 왔다. 입구에서부터 찌르르 찌르르하고 벌레들이 합창이라도 하듯이 온 산을 울렸다. 노랗게 물든 낙엽이 길옆에 수북이 쌓여 걷는 걸음마다 낙엽이 발등위로 올라앉아 가을이 왔음을 알렸다. 대웅전 앞에 섰다. 관음전, 지장전, 팔상전, 독성전, 나한전을 둘러보며 점점 편안한 마음이 되어 갔다. 절 밖으로 나와 숲속에 있는 너럭바위 위에 앉았다. 작은 풀꽃들이 나를 바라보았다. 바위 옆에는 달개비, 여뀌, 구절초, 작은 핑크 꽃 등이 무리지어 화사한 가을 햇빛을 받고 있다. 아름다운 꽃들을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바람이 소리를 내며 지나가고 사시 불공을 알리는 범종소리가 더엉 더어엉 깊은 울림으로 숲속에 펴져 나갔다. 조르륵 조르륵 하며 너럭바위 곁을 흐르는 물소리, 찌르륵 찌르르 벌레우는 소리, 짹짹거리는 새들의 소리가 어울려 산은 작은 오케스트라를 열었다. 바람이 불 때마나 햇빛이 나뭇잎 사이로 들어갔다 나왔다 하며 너럭바위 위에도, 꽃을 그리고 있는 내 손등위에도 환하고 눈부신 꽃무늬가 새겨졌다. 나뭇잎 사이로 들어 온 빛이 또 하나의 꽃을 내 손등위에 그렸다. 눈에 보이는 달개비, 구절초, 여뀌 꽃과 잠깐 보였다가 사라졌다 하는 빛이 만든 꽃이었다. 달개비와 구절초 여뀌 꽃은 실상이고, 보였다가 사라지는 꽃은 마음의 꽃인가. 나는 꽃의 마음을 그리고 싶었다. 더어엉 더어엉!  종소리의 긴 여운이 가슴을 저민다. 또 눈물이 난다. 가을빛은 바람 같은 슬픔과 영원으로 향한 그리움을 함께 안겨준다
이경자

기고자 소개

이경자

수필가

《창조문학》 등단(2007)

한국에세이포럼 회원

수필집 『우리 둘이서 살살 써보자』,
『물수제비를 뜨다』, 『붉은 장미꽃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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