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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청소년

2020년 가을호
청소년이 힘들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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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랑에 물든 감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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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과 함께
김순향
김순향

바랑에 물든 감물

  오랜만에 집에 들어서는 스님의 얼굴이 반짝인다. 자신은 일찍부터 마음에 둔 출가였지만, 부모형제의 상심을 알기에 말을 못하고 수년 동안 마음고생을 했던 아들이다. 그 무렵 많은 번민으로 아들의 얼굴이 퉁퉁 붓기까지 하여도 내막을 알지 못한 채 미련만 떨었던 어미였다. 이제 제가 원하는 공부를 하고 마음먹은 절집 생활을 하니 마음이 편안한지 볼 때마다 얄밉도록 환한 얼굴이다. 아니 빛이 난다.
어제가 큰스님 제삿날이라서 참석하고 가는 길이라며 잠시 집에 들렀다. 세속적인 나는, 아들이 종손으로 태어나서 제 조상은 나 몰라라 하면서, 큰스님 문도라고 먼 길 달려가 제에 참석한 모습이 착잡하다. 이미 출가를 해서 내 것이 아닌 아들을 아직도 내 것이라고 꼭 쥐고 내려놓지를 못하는 것이리라. 언제쯤 맑게 씻긴 무심으로 아들을 완전히 내려놓을 수 있을는지!
가사자락을 모우며 얌전히 꿇어앉는 아들의 모습을 보며 지난 날 갖은 멋을 부리던 미소년의 얼굴을 떠올린다. 우리 부부를 앉혀놓고 마음을 다해 삼배를 하는 스님의 절을 우리 부부도 합장을 하고 받는다. 출가 후 달라진 점 하나는 부모에게 극진하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아들의 출가로 고추장이 된 부모의 속을 다스리려는 것으로 여겼으나 곧 부처님의 가르침에 충실하려는 노력임을 알게 되었다. 부모를 공경하고 효도하라는 경전과 법문을 무수히 읽고 들으며 부모의 마음을 헤아렸음이다.
하루 자고 떠난다기에 빨랫감부터 내놓으라고 재촉한다. 그렇게 말리던 길을 간 녀석이라 다시는 보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천륜은 어쩔 수 없어 오면 반갑고 한 시간이라도 더 곁에 두고 싶다. 평소에 해주지 못했던 승복일습을 내 손으로 빨아서 깔끔하게 다려 입히고 싶어서다.
빨랫감을 하나하나 주머니까지 뒤져보고 세탁기에 넣는다. 마지막으로 바랑을 넣을 차례다. 다른 빨래와 달리 더 촘촘히 살펴본다. 속가 어미의 눈물을 많이도 넣어 가던 회색의 바랑이다. 아랫부분에 짙은 갈색 자국이 있었다. 자국을 지워서 세탁기에 넣으려고 비누로 몇 번이고 빤다. 그래도 지워지지 않아서 새것으로 바꾸어 줄까 생각하다가 옷 주인에게 흔적의 까닭을 물어본다. 감물이 든 것이라고 한다. 절에서 제를 지내고 길을 나서는데 보살 한 분이 승가학교에 가서 먹으라고 바랑 속에 과일 주머니를 넣어주었다 한다. 학교 가서 열어 보니 감이 터져서 책까지 젖었더란다.
그 말을 듣자 울컥해진다. 그 나이에 보살이 준 과일 몇 개에 이리도 흥감하게 표시를 내야 하겠느냐 하고 싶지만, 나도 잊어버리고 사는 아들을 챙겨 준 보살이 너무 고맙다. 지금쯤 강단에 서서 앞서 배운 지식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어야 할 녀석이 가로 늦게 또 다른 학문의 길을 가느라 저리도 고단한 삶을 사는가 싶어 마음이 아리다.  아들에게 말한다. 이 감물 흔적은 스님을 아끼고 사랑한 사람의 마음이니 다른 바랑을 장만하지 말고 다 헤질 때까지 메고 다니라고.
불교와 직접 관련이 없는 세상에서 받은 학위는 불가에서는 소용이 없다. 다시 행자와 사미승 과정을 거쳐 지금은 불교학문의 깊이를 더하는 과정을 밟고 있는 아들이다. 많은 세월을 에둘러 이제야 제 길을 찾은 듯 지금의 생활에 더 없이 행복해 하니 나도 이제 조금씩 걱정에서 놓여나는 중이다. 날이 밝자 스님은 한 손에 무거운 책가방을 들고 등에는 바랑을 지고 현관을 나선다. 춥고 궂은 날씨여서 아들을 떠나보내는 어미 마음이 시리다. 이심전심인가? 물끄러미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내게 회색 승복은 뒤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손을 흔든다. 나도 모르게 바랑에 새겨진 선명한 흔적에 눈이 간다. 비로소 어미의 허허한 마음에 온기가 채워진다

기고자 소개

김순향

계간 《수필세계》 신인상 등단

매일시니어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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