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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가을호
청소년이 힘들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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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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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도 함께
박기옥
박기옥

소리

외출에서 돌아와 현관 앞에서 잠시 발을 멈추었다. 안에서 바이올린 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방학을 틈타 잠시 귀국한 딸아이의 연습하는 모습이 장식유리를 통해 비친다. 흐름을 끊지 않으려고 선 채로 귀를 기울인다.
  처음 바이올린을 접한 나이가 일곱 살이었던가, 여덟 살이었던가. 1년쯤 지난 후에 진도가 어찌 되어 가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소리가 난다고? 벌써 소리가? 나는 아이의 천진한 대답에 잠깐 웃었다. 수영을 시작한 사람이 물에 뜨기 시작했다고 자랑하는 말처럼 들렸던 것이다. 물 위에 뜬다고 그것을 수영이라 할 수 있을까.
   아이는 성실하게 자신의 소리를 만들어갔다. 바이올린 선생의 주문은 ‘둥글고 속이 꽉 찬 소리’였다. 아이는 의문하지 않고 온 몸으로 이를 받아들였다. 레슨 다녀올 때마다 아이의 소리는 눈에 띄게 달라졌다. 허술한 소리를 자책하거나 자기의 소리에 매몰되는 법이 없었다. 굽은 소리는 펴고 모난 소리는 깎고 빈 소리는 채워갔다. 화선지같이 빈 마음에 선생의 가르침이 먹물처럼 스며든 결과이리라.
  소리가 모양을 잡아가자 선생은 ‘띄워 보내는 소리’를 주문했다. 안으로 안으로 깊게 품은 소리를 잘 익혀 밖으로 보내는 훈련이었다. 청중과의 소통이었다. 아이는 이번에도 갈등하지 않았다. 주저하지도 서두르지도 않고 아이다운 무구(無垢)함으로 소리를 품고 내보내는 일에 몰두했다.
   어느 날, 아이는 특이한 소리를 선보였다. 피아노 앞에 앉아 연습곡을 치고 있는 남동생에게 슬그머니 다가가더니 바이올린을 들어 화음을 넣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동생이 치는 곡은 지극히 단순했다. 이제 겨우 양손 연습에 들어간 참이어서 음악이라고 할 수 조차도 없는 수준이었다. 그나마도 손 모양이 바르지 않아서 엄마인 나에게 꾸중을 듣고 있던 참이었다.
  누나의 화음은 감동이었다. 하찮은 연습곡이 순식간에 근사한 듀엣곡으로 살아났다. 아름답고 감미로운 멜로디가 서서히 번지면서 갑자기 온 집에 꽃이 우우 피어나는 듯 했다. 동생은 신이 나서 어깨를 들썩이고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집안 가득 퍼져 나갔다. 아이는 이제 화합의 아름다움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이와 달리 나는 쉽게 소리가 얻어지지 않았다. 나에게 있어 소리를 내는 일은 삶을 꾸려가는 일일 터였다. ‘둥글고 속이 꽉 찬 소리’는 충실한 자기 삶을 만드는 일이었다. ‘띄워 보내는 소리’는 세상과의 소통을 말함이리라.
  나는 그 어느 것에도 편하게 이르지 못했다. 늦은 나이까지 가정과 직장을 병행해야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차라리 소리가 없었다고 보는 편이 옳았다. 어디에도 나는 없었다. 아무 것도 내 것은 없었다. 목적한 소리는 있으나 내 것으로 품어지지 않았고 세상의 소리는 미처 내 안에 들이기도 전에 공중으로 흩어졌다. 나는 그저 아이 넷을 둔 평범한 직장 여성으로서 지우개처럼 매일 조금씩 닳아 없어지고 있을 따름이었다.
  소리꾼들은 대체 어떻게 소리를 얻을까? 어느 해 봄, 영화 <서편제>에서 본 소리꾼의 득음 훈련은 등짝을 후려치는 감동이었다. 저음에서 고음까지 높고 깊고 넓게 혼을 바쳐 소리 지르면 목이 잠기고 피가 솟는다. 피를 토하면서도 멈추지 않고 한, 두해 목을 풀었다 잠갔다 하다 보면 옆에서도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목이 콱 쉬다가 마침내 트인다. 득음이다.   <서편제>에서는 소리를 통한 화합이 압권이다. 창을 하는 여인은 장님이고 북을 잡은 고수는 배 다른 남동생이다. 이룰 수 없는 사랑을 가슴에 품은 두 사람은 20년 전에 헤어졌다가 오늘에야 만났다. 세월만큼 쌓인 한을 안고 창(唱)과 북으로 마주 앉은 것이다.
  “아이구 아버지 아니시오 -”
  심청가를 뽑는 여인이 사무친 한(恨)을 토하자 고수의 북이 둥둥둥 소리를 받친다. 창과 북이 소리와 장단으로 어우러진다. 창도 창이지만 장단을 짚어내는 고수의 솜씨 또한 예사롭지 않다. 몸 곳곳에 북 가락이 잔뜩 끼어있음이 보인다.
  소리가 나가다가 숨이 딸려서 처진다 싶으면 ‘얼씨구나’ 부추기고, 소리가 슬프게 나올 때는 북 가락을 줄여 ‘얼쑤-’하며 북소리도 낮춘다. 소리가 씩씩하게 나갈 때는 북장단도 크게 쳐서 ‘얼씨구 좋다’ 소리를 돋운다. 밀고 당기고 맺고 풀며 소리를 다듬고 어루만지는 것이다. 몸을 대지 않고도 소리와 북으로 서로 희롱하고 보듬고 내치고 거둔다. 소리를 통하여 화합에 이르는 길이 이리도 아름다울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바이올린이나 창이나 삶의 소리나 쉽게 얻어지는 것은 없었다. 내닫기만 한다고 좋은 소리가 만들어지는 것도 아닐뿐더러 어느 날 갑자기 좋은 소리가 기적처럼 찾아오는 것은 더욱 아니었다. 내 안에 있는 수많은 나를 비우는 것도 어렵지만 목적한 소리에 온전히 나를 쏟아붓는 일도 쉽지 않았다. 비우고 채우느라 피 토한 목이 수 없이 잠겼다 풀렸다 하는 중에 비로소 자기의 소리가 얻어지는 것이었다.
  한(恨)을 삭이는 일도 다르지 않았다. 명창들은 생(生) 또한 한으로 간주한다. 삶 자체를 한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살아가는 일이 한을 쌓는 일이요 한을 쌓는 일이 살아가는 일이라고 한다. 응어리진 한을 넘어서야 소리에 한을 실을 수 있다고도 한다. 나는 그 넘어섬을‘자유’로 이해한다. 나로 부터도 소리로 부터도 자유롭기를 희망한다.
  문득 아이의 바이올린 소리가 멈춘다. 현관 앞에서 엄마의 귀 기울이는 소리가 들린 것일까. 나는 짐짓 침묵으로 나의 존재를 알린다. 침묵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소리를 듣는다. 악기 내려놓는 소리, 활 푸는 소리, 발자국 소리 ---. 소리는 우리의 삶에서 소통이자 화합이며. 막아선 벽을 뚫고 드나드는 길일 터이다. 이제 곧 아이의 문 여는 소리가 들릴 것이다

기고자 소개

박기옥

《한국수필》 등단

수필집 『아무도 모른다』 『커피 칸타타』 『쾌락의 이해』

서정주 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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