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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지도연구원

대전청소년

2020년 겨울호
청소년이 힘들 때
국번없이 1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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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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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과 함께
박월수
박월수

경계

강은 경계를 이룬다. 사람의 언어와 생활방식을 구분 짓고 사람과 사람사이를 나누어 놓기도 한다.
나는 한때 강의 저쪽에 살면서 강의 이쪽에서 생활했었다. 강의 저쪽에 있는 집은 넓고 값이 쌌으며, 주변 경관이 아름다웠다. 산책길에 마주친 이웃들의 눈빛은 온화했으며 강의 이쪽에 있는 일터와는 가까워서 불편할 일도 없었다.
내 일터는 대단지 아파트 앞 상가에 있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강의 이쪽 여자들과 어울려 운동을 즐기고 함께 밥을 먹으러 다녔다. 그녀들은 하나같이 내 집의 위치와 크기를 궁금해 했다. 내가 강의 저쪽에 산다는 걸 알았을 때 그녀들의 표정은 이전과는 달랐다. 그녀들 눈에 비친 나는 변방에 사는 경계인에 불과한 모양이었다. 내가 만나는 강의 이쪽 여자들은 마음에 음악을 지니고 살거나 시를 음미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그녀들 마음속에는 집의 크기나 자동차의 종류가 너무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다른 건 들어설 자리가 남아있지 않은가 보았다. 그녀들과 키 작은 꽃에 대해 이야기하고 지는 해를 함께 바라보기엔 우리들 사이의 간격이 멀고 깊다는 걸 어리석은 나는 미처 알지 못했다.
나는 강의 저쪽을 사랑했다. 강에서 올라온 물안개가 서서히 들녘으로 번지는 새벽은 몽상을 하기에 좋았다. 안개 속을 천천히 걸으며 지상에 없는 헤세를 만나고 그가 노래한 블론드의 소녀가 되기도 했다. 길가에 핀 노란 씀바귀 꽃이 바람에 흔들리는 걸 지켜볼 때면 마음 귀퉁이에 재워둔 꿈들이 향기를 뿜으며 출렁거렸다. 농부들의 일상을 묵묵히 지켜본 하루는 방안에서 책을 보며 지낸 어떤 날 보다 마음이 풍요로웠다.
주말이 돌아와 아이들과 오롯이 강 저쪽에서 지내는 날은 행복했다. 연잎 우산을 받쳐 든 채 들판을 산책하고 흐르는 강물에 물수제비를 뜨며 놀았다. 나란히 손을 잡고 강둑을 거닐며 아직 덜 핀 도라지꽃을 터트리곤 까르르 웃기도 했다. 모래밭 감자와 양배추 이삭을 줍던 아이들의 표정은 사막에서 만난 어린왕자 같아 한참을 넋 놓고 바라보기도 했다. 별이 맑고 바람이 달콤한 저녁이면 일터가 있는 강 건너를 바라보며 떠나오길 잘했다고 얼마나 되뇌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내 의식의 일정 부분은 세속을 좋아한다는 걸 어느 순간 알게 되었다. 강의 이쪽 사람이 되기 위해 바동거리는 나를 발견하고는 몹시 참혹한 생각에 빠져들고는 했으니까. 그럴 때 소로우를 알게 되었다. 그는 내가 태어나기 한 세기도 훨씬 전에 월든 호숫가에 오두막을 짓고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산 사람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이 고을의 한 두 가정은 거의 평생 동안 교외에 있는 집을 팔고 마을로 들어오려고 했으나 아직도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으니 죽어서도 자유의 몸이 될지 모르겠다.” “적당한 나무상자 하나로도 족한데 많은 사람들이 이보다 더 크고 호화로운 상자를 빌려서 살며 그 대금을 치르느라 죽을 고생을 하고 있다. 집을 사고 나서 부자가 된 것이 아니라 더 가난하게 되었고, 집이 그를 소유하게 되었다.” 아포리즘에 가까운 그의 날카로운 지적에 정신이 화들짝 들었다. 나는 내 의지에 의해 강의 저쪽 사람이 된 걸 잊고 있었다. 나를 지배하는 건 집이 아니라 영혼이어야 한다. 그제야 날마다 소풍을 가듯 초록 바람이 부는 들녘을 지나 강을 건너 일터로 향하던 여유를 다시 찾았다.
강의 저쪽에서 나이 들고 싶다던 마음은 아이들이 자라 상급학교에 가게 되면서 바뀌게 되었다. 날마다 오랜 시간 버스에서 시달려야 할 아이들을 생각하니 어쩔 수 없었다. 강의 저쪽에 있는 감미로운 풍경을 뒤로 하고 나는 필요에 의해 강의 이쪽 사람이 되었다. 옮겨 온 이쪽 둥지는 숨쉬기가 불편했다. 고층 아파트의 꼭대기 층이지만 새까만 매연은 안방까지 날아들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경계인이 아니라 강의 이쪽 사람인 것이 적이 안심이 되기도 했다. 단지 ‘자연으로부터의 도피’인줄을 처음엔 몰랐다.
오만한 생각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강의 이쪽에도 보이지 않는 경계는 무수히 많았다. 가는 곳마다 그어진 금들이 나를 휘청이게 했다. 사람의 숲에서 사람이 쳐 놓은 그물에 걸려 넘어지기 일쑤였다. 이제 나는 경계 저쪽, 떠나 온 자연으로 가기 위해 강의 이쪽으로부터의 탈출을 꿈꾼다

기고자 소개

박월수

부산일보 신춘문예 수필부문 당선

《수필세계》 신인상 등단

수필집 『달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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