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청소년지도연구원

대전청소년

2020년 겨울호
청소년이 힘들 때
국번없이 1388
24시간 연결됩니다

나비, 날개를 펴다

본문

부모님과 함께
신숙자
신숙자

나비, 날개를 펴다

이전移轉한 강의실에서 첫 수업이 있는 날이다. 바뀐 장소를 찾아 거리를 두리번거리다 낯익은 간판 하나에 시선이 꽂힌다. 우리 집에서 떠나온 ‘나비문고’가 예술인의 중심지인 문화의 거리에서 터를 잡고 있다.
한때 최고의 번화가로 명승을 날리던 거리가 도시 확장으로 침체되었던 곳이다. 최근 들어 다양한 예술 활동이 펼쳐지면서 활기를 되찾아간다. 문화의 거리에서 시민의 감성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는 나비문고를 보는 순간 옛 친구를 재회한 듯 반갑기 그지없다.
나비문고와 인연이 닿은 건 몇 해 전이었다. 식곤증으로 나른해진 어느 날 오후, 초인종 소리에 놀라 설푼 졸았던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인터폰 화면으로 남자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어 보였다.
“누구세요?”
“점포 보러 왔습니다.”
무슨 일을 하려는지 알 수 없는 나비 한 마리가 그렇게 찾아왔다. 그 무렵 아래층은 여러 달째 비어 있었다. 더러 공인중개사 직원이 사람을 데리고 왔지만 쉽게 새 주인을 만나지 못한 터라 반가움이 앞섰다. 가게 문을 열자 퀴퀴한 냄새가 콧속으로 훅 밀려 들어왔다. 사람 훈기가 사리진 가게 안에는 거미들이 집을 짓느라 갖은 힘을 쓰고 있었다.
목이 좋은 편은 아닌데 점포가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무슨 일을 하려는지 묻는 말에 ‘나비문고’를 운영한다고 했다. 헌책을 기부 받아 재기부하는 일이었다. 책은 두께를 막론하고 가운데를 펼치면 모양이 나비를 닮았다. 나비라는 문고 이름도 그렇게 만들어진 것 같았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책방을 운영하면서 취약계층에 도서 기부하는 일에 앞장서는 사람이었다. ‘사회적 기업’이지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책과 함께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어 가려는 의지가 얼굴에 가득 차 보였다.
문제는 보증금이었다. 다른 곳에 영업점이 있는데 계약 만기일이 되지 않아 당장 전세금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보증금도 없이 점포부터 달라니, 살면서 몇 번 세를 놓은 적은 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더러 세입자 때문에 골탕 먹은 상가 주인도 보았다. 행여 헌책만 남겨두고 나 몰라라 하면 어쩐단 말인가.
거듭되는 사정 이야기에 마음이 약해졌다. 무엇보다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동료를 위해서 계단 없는 상가가 필요하다는 말에 설복 되었다. 그동안 점포를 탐내는 사람이 없진 않았지만, 시끄러운 게 싫어서 업종을 고르던 참이었다. 그렇게 사람을 가렸는데 난처하게도 경제적으로나 신체적으로 무르고 약해 보이는 나비가 아래층에다 꽃밭을 일구려고 했다.
생각해보면 새 책으로 공부해본 기회가 별로 없었다. 중학교 시절, 얻어온 국어책에는 낱말 뜻이 먹칠되어 있었고, 수학책에는 풀어놓은 공식들이 깨알처럼 굴러다녔다. 김빠진 국 사발을 받아 놓은 듯 수업에 흥미를 잃었던 기억이 상처의 흔적처럼 짙게 남아 있었다. 책뿐만 아니었다. 평상복은 물론이고 교복까지 이웃 마을 언니에게 얻어 입고 자랐다.
초록은 동색이라 했던가. 그런 내 앞에 헌책 장사라니, 금방 한 식구가 된 듯 마음이 쓰였다. 인연이 닿든 안 닿든 집안에 쌓아둔 책부터 전해주고 싶었다. 큰돈 벌이가 되는 직업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가게에 딸린 열쇠꾸러미를 넘기며 한 마디를 보탰다.
“우리 집에 들어온 사람들은 다 돈을 벌어서 나갔습니다, 사장님도 사업 번창하세요.” 열쇠를 넘긴 며칠 뒤, 아래층에는 봄도 아닌데 노랑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칙칙하고 어둡던 가게 문과 간판이 샛노랗게 단장되어 금방이라도 나비가 날아들 것 같았다. 그렇게 문고가 꾸며지고 아래층이 전에 없이 환해지자 내가 처음 이 동네로 이사를 왔을 때의 주변 상가들이 떠올랐다.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 한 블록 아래에는 소규모의 점포들이 서로 키를 재며 고만고만하게 살아갔다. 대로 건너에 있는 서너 개의 책방은 인기 좋은 상가였다. 참고서는 말할 것도 없고 각종 교양서적, 신간소설, 월간잡지 등이 수월찮게 판매되었다. 그랬던 서점이 언제부턴가 컴퓨터 수리점, 자전거방, 분식점 등으로 업종이 변경되기 시작했다. 가까이 중 고등학교가 있는데도 서점 경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만큼 책을 읽는 사람이 줄어들었다는 뜻일까? 근래 출간도 되기 전에 베스트셀러에 오른 책도 있다는 걸 보면 딱히 그런 건 아닐 성싶다.
불필요한 책을 함부로 버리지 않을 만큼 시민의식이 높아지고 있다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 앞섰다. 눈만 뜨면 따끈따끈한 신간들이 홍수처럼 쏟아지는 세상인데 헌책이 먹히기나 할까. 묵은내 풍기는 헌책을 얼마나 팔아야 가겟세며 직원 인건비를 댈 수 있을지 오지랖이 꼬리를 물었다.
그래도 책방은 책방이다. 이 얼마나 고상한 직업인가. 내 것도 아닌데 한 층만 내려가면 수많은 책이 가득 진열되어 있다고 생각하니 곳간에 쌀이 찬 듯 마음이 뿌듯했다. 재활용으로 자원 낭비를 막고 구매자의 호주머니 부담까지 덜어주는 직업이기에 기꺼이 환영하고 도와주어야 옳았다.
그러구러 일 년이 조금 지났을 무렵, 마냥 있을 줄 알았던 사람이 갑자기 가게를 비운다고 했다. 노란 색깔의 선팅지가 빛도 바래기 전에 떠난다니 세입자 중 가장 단기간에 끝나는 인연이라 서운함이 앞섰다. 왜, 무엇 때문에, 계획했던 만큼 영업이 잘 되지 않았던 것일까.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문을 닫는 이유가 도와주지 못한 내 탓인 것 같아 잡지도 말리지도 못했다. 만나면 으레 헤어지는 법이고, 떠나간 자리는 다시 채워지기 마련이다. 노랑나비 색깔의 점포 문이 파란 바다색으로 바뀌면서 헌책방의 기억은 창고 깊숙이 밀려들어갔다.
문화의 중심지에서 제자리를 잡은 듯한 노란 간판을 보니 끊어진 인연의 끈이 다시 이어진 기분이다. 사거리 한쪽 모서리에는 나비문고가 공중전화부스를 개조해 앙증맞은 책방을 꾸며놓았다. 내친김에 들어가 한 권의 책을 골라본다. 용케도 고른 책이 새 책 같다. 필경 전 주인의 손길이 페이지마다 닿았을 텐데 속속들이 손때라곤 없다. 한 점 연필 자국도 남겨져 있지 않은 것을 보면 분명 책을 아끼는 사람이리라.
거리로 나서자 샛노란 유도블록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노란 블록의 점선이 누군가에게 길라잡이가 되듯이, 한 권의 책이 나에게는 또 다른 미지의 세계로 안내할 유도선이 될 터이다. 나비문고에서 상생의 힘을 얻는다.
나비야 훨훨 날아라

기고자 소개

신숙자

《에세이문예》 등단.

‘우리 숲 이야기’ 공모전 수상

맨위로 이동 맨아래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