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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지도연구원

대전청소년

2021년 봄호
청소년이 힘들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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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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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도 함께
이순혜
이순혜

아들아 사랑한다

노인대학을 개강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모여 서예, 민요, 공예, 노래 등을 배운다. 학생들의 모습은 다양하다. 민요반에는 초등학교 교장으로 퇴직한 할아버지가 있다. 그는 항상 중절모를 쓰고 온다. 민요 가락이 좋고, 장구 치는 것이 재미있다며 싱글벙글한다. 레크리에이션 시간에 할머니와 짝을 맞추어 율동할 때는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부끄럼을 탄다.
어떤 할머니는 중풍을 앓은 후유증으로 걸음걸이가 시원찮다. 그 할머니 곁에는 항상 지팡이가 있다. 십 분도 안 걸리는 거리를 지팡이를 의지해 삼십 분이 넘게 걸어온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살아온 길은 달라도 목요일이면 목청껏 웃는 학생이 된다.
나는 한글반 수업을 맡고 있다. 한글반 학생은 모두 열한 명의 할머니들이다. 책상 위에 박하사탕을 준비해 놓고 떨리는 마음으로 첫 수업을 했다. 기역 니은부터 시작했다. 먼저 칠판에 써놓고 따라 읽게 하니 할머니들의 목소리가 낭랑했다. 다음엔 ‘가나다라’였다. 기역이 혼자 외로워 ‘ㅏ’를 만나 ‘가’가 되었다고 설명했다. ‘가’로 시작하는 말을 찾아보자고 했더니 가지, 가방, 가랑비, 가오리…. 끝도 없이 이어졌다.
서너 평 남짓한 교실에 모여 앉은 할머니 학생들의 모습이 진지했다.
한글반 학생들의 평균 나이는 칠십이 넘는다. 배움의 시기를 놓친 분들이다. 젊어서는 먹고 살기 바빠 글을 배우는 건 꿈도 꾸지 못했다고 한다. 누군가 그렇게 말하자, 그때는 그랬어,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글씨를 서너 줄 쓰고는 손이 떨린다며 연필을 내려놓는 할머니도 있었다. 칠십 평생 연필 잡은 건 처음이라며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그 이슬이 내 마음에 그대로 스며들었다.
할머니 학생들도 숙제를 한다. 손주들이 읽는 동화책에서 짧은 문장을 베껴 오기도 한다. 어찌나 정성 들여 써오는지 여덟 칸 공책에 담긴 글씨가 반듯하다. 동네 노인정에 가서도 숙제부터 한다고 자랑이다. 나는 일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준다. 잘했다는 말도 잊지 않는다. 목요일마다 할머니 학생들은 칭찬받기에 바쁘다.
나이 든 학생들도 시샘이 있다. 어느 날 한 할머니가 생활한복을 곱게 입고 호박반지를 끼고 왔다. 내가 보기 좋다고 내가 한마디 했더니 옆에 있던 할머니가 나서서 아들이 해준 생일 선물이라고 거들었다. 서울의 유명한 백화점에서 샀다는 말도 덧붙였다. 공부는 뒷전이고 옷이며 반지 이야기로 한참 시끄러웠다.
그 다음날 수업 시간이었다. 여러 할머니들의 목걸이와 반지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은반지와 금반지를 나란히 낀 분, 아예 목걸이와 반지를 짝 맞춰 한 분, 그동안 장롱 깊이 모셔두었던 패물을 다 꺼내 치장하고 온 듯했다. 반지 낀 손을 자랑이라도 하듯 손놀림이 부산했다. 어제 보기 좋다는 말을 듣고 부러웠던 모양이다.
여자는 나이가 들어도 여자라고 하더니….
학기가 거의 끝날 무렵이었다. 한 할머니가 공책을 펴들고 내게 다가왔다. 대뜸 ‘아들아 사랑한다.’라고 써보라 했다. 남들보다 열심히 숙제해오던 분이었다. 연습장에 아들과 며느리, 딸과 사위 이름까지 적어 오곤 했다. 공책에는 손주들의 이름이 빼곡했다. 그분께서 내게 ‘아들아 사랑한다.’를 적어달라는 것이었다. 글을 배우면 제일 먼저 아들에게 편지를 쓰고 싶었단다. 나는 코끝이 찡했다. ‘아들아 사랑한다.’ 라고 쓰고 내친김에 ‘어미야 너도 많이 사랑 한다.’라는 말도 적어 주었다.
살아오면서 할머니는 아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을까? 영감님에겐들 그런 말을 했으랴. 처음으로 써보는 그 글에는 수천, 수만의 이야기가 담겼을 것이다. 한눈에 들어오는 짧은 문장이지만 말로 다 할 수 없는 어머니의 사랑을 가늠할 수 있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그 한마디야말로 칠십 평생 다져진 참사랑이 아닐까.
나는 아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한다. 눈만 마주쳐도 그런 말이 저절로 나온다. 아들은 어렸을 때 “엄마 나도 사랑해”라며 곧잘 달려와 안기곤 했다. 조금 커서는 ‘미투(me too)’라며 한 발짝 물러나더니 요즈음은 그런 대꾸조차 듣기 어렵다. 대꾸는커녕 분위기가 잡힐 만하면 슬슬 자리를 피한다. 아무래도 방법을 바꿔야겠다. 말로 못하면 글로 쓰는 수밖에. 아껴두었다가 편지를 써야겠다. 사랑한다고.
목요일이 기다려진다. 그날은 아침부터 설렌다. 노인대학 학생은 내게 한글을 배우지만 나는 그분들에게서 인생을 배운다. 중국 북송시대 시인인 소동파의 시구詩句에 인생도처유청산(人生到處有靑山)이라 하여 인생 곳곳에 청산이 있다고 했다. 이곳이 바로 청산일 것이다.
다음 수업 시간에는 낱말 찾기를 해 볼 생각이다. 종이를 잘라 낱말 카드를 만든다.
카드 한 장에는 이렇게 쓴다. ‘아들아 사랑한다!’

기고자 소개

이순혜

수필가

작품집 『우편물은 현대슈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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