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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지도연구원

대전청소년

2021년 여름호
청소년이 힘들 때
국번없이 1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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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회용 친절은 사양할게

본문

부모님과 함께
임수현
임수현

일회용 친절은 사양할게

당신이 무인도에 갈 때 가져갈 한 권의 책은?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자기 앞의 생』이라고 말한다. 에밀 아자르나 로맹 가리거나 누가 되었던 자기 앞의 생은 자기밖에 헤쳐갈 수 없다. 악몽을 꾸는지 좋은 꿈을 꾸는지 자신밖에 모르듯 말이다. 당신이 악몽을 꾸고 있다고 해도 누구도 꿈속으로 나무토막을 던져 줄 수 없지 않는가.
나는 이 책을 여러 사람에게 선물했다. 선물할 때마다 “자기 앞에 주어진 생을 찬찬히 살피며 사랑하세요.” 꽤 멋진 말을 적곤 했다. 그 말은 실은 나에게 하는 말이었다. 4남매의 맏이인 나에게 아버지는 “넌 맏이니까, 동생들 잘 챙겨야 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때 나도 누군가의 챙김을 받을 나이였지 내가 누가 누굴 챙길 나이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생들을 잘 챙겨야 한다는 강박은 꽤 오래 나를 길들였다. 반작용 효과였을까. 내 삶은 내가 알아서, 그러니까 너는 신경 쓰지 마! 내가 알아서 할게. 같은 말을 가까운 사람들에게 남발했었다. 상대의 배려 따위는 필요 없어, 일회용 친절은 사양할게. 뭐 그런 마음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느 순간 그런 말을 하는 내가 꽤 멋지다고 생각하기도 했으니 이쯤 되면 자기애가 넘치다 못해 타인의 친절마저 무시했다. 하여간 나는 늘 그런 태도가 좋았다. 동생들에게도 각자도생해라. 가족끼리 돈거래 하는 거 아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다. 식의 말로 맏이로서 책임감에서 빠져나갔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동생들에게 내가 먼저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었고, 아쉬운 소리도 내 쪽에서 먼저 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지금껏 우리 4남매는 꽤 우애 있게 지낸다. 서로 각자의 일을 하면서 자기 앞에 주어진 삶을 잘 살아내고 있다. 그것만으로 나는 각자의 몫을 다 했다고 믿는다. 윤여정 배우의 아카데미상 수상 소감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건 “경쟁 싫다. 1등 되는 것 하지 말고 ‘최중最中’ 이 되면 안 되나? 같이 살면 안 되나?” 였다. 각자 앞에 주어진 삶에서 그저 내 앞에 놓인 일을 계속하는 거. 그러다 보면 내 차례도 오지 않을까?
『자기 앞의 생』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 자기 앞의 놓인 생을 묵묵히 살아가는 것, 그리고 사랑할 것. 그게 자기애든 방어기제든 존버1) 만이 자기 앞에 주어진 생에 내가 던져주는 나무토막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위로나 충고의 말보다 슬며시 책 한 권을 선물해주는 게 나을지 모른다. 생의 한가운데에서 어디로 갈지 몰라 헤매는 당신에게 그리고 나에게 힘껏 알아서 하시라고!
1) 존버 : ‘지금의 상황을 견디고 견뎌 미래를 기대한다’는 신조어. 혜민 스님의 산문집 『멈추면 보이는 것들』에서 이외수 씨와 대담에서 처음 나온 말

기고자 소개

임수현

시인, 아동문학가

2016 《창비어린이》 동시 부문 신인 문학상,

2017 《시인동네》 시 부문 신인 문학상,

2019년 《문학동네》 동시 문학상 대상,

작품집 『외톨이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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