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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지도연구원

대전청소년

2021년 여름호
청소년이 힘들 때
국번없이 1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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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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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도 함께
이윤경
이윤경

빛나는 날

매주 수요일 점심시간, 내가 일하는 회사로 선생님이 찾아오신다. 일주일에 한 번 씩 교재를 받아 다 풀고 나면 그 다음 주에 선생님이 숙제 검사를 한다. 지난주 배운 글자를 받아쓰기도 한다. 한 번도 숙제를 미룬 적 없고 받아쓰기도 곧잘 하니 썩 성실한 학생인 듯싶다. 몇 년 전부터 방문 학습지로 한자 공부를 하고 있다. 어린 시절 처음 글자를 배웠던 그때처럼, 배운 글자를 만나면 신나서 아는 척 하고 싶어 달려간다. 일부러 신문을 펼쳐 놓고 한자가 많은 지면을 찾아 읽어 보기도 한다. 여행을 가면 유적지나 고택 같은 곳에 있는 비석이나 기둥에 쓰인 주련(柱聯)을 만나면 아는 글자를 찾아 손으로 짚어가며 소리 내어 읽는다. 아직은 모르는 글자가 더 많기는 하지만 하나씩 알아가는 재미가 새롭다.
중고등학교 때도 한문 시간이 재미있었다. 하지만 시험 준비로 외워서인지 돌아서면 금방 잊어버렸다. 한자를 읽고 쓸 기회가 줄어드니 자연히 관심도 사라졌다. 아이들을 키우고 난 후, 늦은 나이에 하고 싶었던 국문학 공부를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국문학사나 중세 국어 교재에는 한자가 빽빽했다. 강의 시간에 한시를 배웠는데 고려 시대의 문인 정지상의 한시 송인(送人)을 읽고 한시의 멋과 맛을 좋아하게 되었다. 한자 공부를 시작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이기도 하다. 한시를 쓰지는 못하지만 제대로 알고 읽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한자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된 한자의 구성과 유래도 재미있었다. 각각의 글자가 가진 의미와 구성 원리에는 옛사람들의 지혜와 이야기가 들어있다. 다양한 상황을 빗댄 고사성어에는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와 철학이 담겨있다. 함축된 글자 속에 깔린 옛 이야기의 뜻을 알아가고 적절하게 대화나 글에 써먹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삶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와 자세에 대해, 때론 분명하게, 때론 우화처럼 에둘러 말한다. 함축된 글자 속에서 누적 된 지혜를 배운다.
한자 공부를 하면서 몇 몇 좋아하는 글자들이 생겼다. 볼 관(觀), 빛날 요 (曜), 넉넉할 유(裕), 한가 할 한 (閑), 그 중에서 빛날 요 (曜)자를 가장 좋아한다. 빛날 요(曜)는 우리가 일상에서 매일 쓰고 있는 요일을 나타내는 글자다. 각기 다른 뜻을 가진 글자를 합쳐서 새로운 글자를 만드는 회의문자(會意文字)다. 글자를 풀어 써보면 날 일(日)자에, 꿩 적(翟)자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글자다. 빛나는 햇살이 비추어서 꿩의 날개가 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것이다.
일요일(日曜日)은 해가 빛나는 날이고, 월요일(月曜日)은 달이 빛나는 날, 불꽃이 빛나는 화요일(火曜日), 물결이 빛나는 수요일(水曜日), 나무들이 반짝이며 빛나는 목요일(木曜日), 쇠붙이들이 빛나는 금요일(金曜日), 흙이 빛나는 토요일(土曜日), 그러고 보니 일주일이, 하루하루가 제각기 모두 빛나는 날로 이루어졌다.
우리는 빛나는 매일을 살아내고, 빛나는 시간 속으로 날마다 걸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세상이 어둡다고 여기는 건 그 세상에서 내가 빛나지 않는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돋보이고 빛나려 애쓴다. 그래서 삶이 힘들어진다. 예전의 나도 그랬다. 어디서든 돋보이고 싶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 받고 인정받고 싶었다. 그렇지 못할 때 나 스스로가 못나 보이고 자존감이 떨어졌다. 그것도 부족하면 빛나 보인다고 생각되는 사람들 틈에 끼어 있으려고 애썼다. 까마귀가 다른 새들의 깃을 꽂은 것처럼 겉을 닦고 치장했다. 그럴수록 빛나는 게 아니라 더 초라해진다는 걸 시간이 흐른 후에 알았다. 고운 빛은 겉이 아니라 안으로 부터 저절로 배어나온다. 빛 가운데로 나가 당당하게 서 있을 수 있는 용기 또한 필요하다. 뜨거움을 견딜 단단한 자아를 곧추 세운 후에라야, 빛도 그늘도 어둠도 두려워하지 않는 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독일의 시인 라이너 쿤체의 시 ‘은엉겅퀴’를 자주 읽고 암송한다. 삶의 자세라든가 관계에 대한 시인의 철학이 쉽지만 아름다운 시어로 쓰여 있다. 더 이상 어떻게 이처럼 간결하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을까?
은엉겅퀴
뒤로 물러서 있기
땅에 몸을 대고
남에게 그림자 드리우지 않기
남들의 그림자 속에서
빛나기
사람도 꽃도 별도 스스로 빛나는 건 없다. 보석도 다듬어야 빛이 난다. 해가 비추고, 다른 사물과 다른 사람이 배경이 되어주기 때문에 빛나 보이는 것이다. 진광불휘(眞光不輝)라는 말이 있다. 참된 빛은 요란하게 번쩍 거리지 않는다. 드러내지 않아도 그늘에 가려 있어도 고요히 제 빛을 발하는 것이다. 지금 내가 빛나지 않으면 또 어떠랴. 온 천지 사방이 꽃으로 빛나고, 봄 햇살이 가 닿은 모든 사물들이 저렇게 반짝이는데......
오늘은 화요일, 불꽃처럼 빛나는 하루를 살고 있는 나와 당신들, 서로의 등 뒤에서 고요히 배경이 되어주자. 빛은 반사되기 마련이다

기고자 소개

이윤경

수필가

《제주영주신문》 신춘문예 수필 당선(2010)

《매일신문》 신춘문예 동시 당선(2008)

제35회 창주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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