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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청소년

2019년 가을호
청소년이 힘들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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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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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과 함께
김영모
김영모

별명

사람은 살아가면서 한두 개쯤의 별명은 가지게 된다. 별명이란 어찌 보면 그 사람에 대한 관심일 수도 있다. 대체적으로 좋은 뜻이거나 듣기 좋으라고 붙여주는 경우는 드물고, 놀리기 위해 붙이는 것이기 때문에 당사자로서는 고민이 뒤따른다.
나 또한 별명이 있었다. 초등학교 때는 ‘영감’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초등학생답게 가장 원시적인 작명법인 내 이름에 ‘영’자가 붙었다는 이유로 열 살도 안 되었는데 영감이 되었다. 이를테면 철수는 ‘철부지’, 상구는 ‘상놈’, 이런 식으로 어처구니없게 붙여진 별명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별것 아닌, 그런대로 들을 만한 별명인데 그때는 왜 그리 듣기 싫었던지. 화도 내보고, 맛있는 사탕도 사주고 해봤지만 그 때 뿐 소용이 없었다. 별명 때문에 학교에 가기 싫었다.
실제로 정말 듣기 싫은 별명은 신체적 약점을 가지고 지은 별명이다. 곰보에게 ‘곰보’라고 하는 것, 째보에게 ‘째보’라 하는 것 등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 여자 가수 중에 흑인 혼혈인 가수는 대단한 사람이다. 그녀도 어렸을 때 참기 어려운 별명을 가졌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그러나 그 가수는 그런 차별과 냉소의 역경을 뚫고 톱 가수가 되어 국민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국민가수로 성장했다. 유쾌하게 관중을 사로잡는 무대 매너와 60대의 나이로 20대들의 아이돌이나 출 수 있는 격렬한 댄스풍 노래도 히트시키고 보디빌딩 대회에서 수상도 하고 그늘이라고는 없는 가수다. 국악이면 국악, 트로트면 트로트 무슨 노래고 못하는 노래가 없다. 그래서 나는 그 가수를 좋아한다. 아니 존경한다. 그 분에게 붙여졌음직한 ‘깜둥이’나 ‘트기’ 대신 내 별명인 ‘영감’ 정도는 얼마나 고마운 별명이었을까.
중학교 때의 나의 별명은 ‘털보’였다. 학교에 좀 늦게 들어간 탓에 코밑수염이 나기 시작했고, 우성 유전자의 영향으로 털이 많은 편이어서 생긴 별명이었다. 영감보다 더 싫었다. 다른 학교로 전학가고 싶었다. 고등학교는 서울로 유학을 갔는데 다행히 별명이 없었다. 너구리, 깜상, 두더지, 고릴라 등 다른 친구들의 별명을 열심히 부르며 흐뭇해했다.
1학년 2학기가 되어 아버지가 학교로 찾아왔다. 한복 바지, 저고리에 두루마기를 입고 복도에서 기다리다가 수업이 끝나자마자 담임선생께 깍듯이 인사를 했다.
미련한 자식 놈을 맡겨 놓고 진작 찾아 뵈었어야 도리인데 이렇게 늦었다는 것과 지도 편달을 부탁드린다는 진정어린 인사였다. 수도 서울에서는 그리 쉽게 볼 수 있는 복장과 광경은 아니었다. 참 부끄러웠다.
종례시간에 선생님이 흐뭇한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너 어디 김 씨냐?” 내가 안동 어디라고 대답하자 “내 그럴 줄 알았다. 너 오늘부터 양반이다.”라고 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양반’이 되었다. “봐봐. 걸음걸이도 팔자걸음이잖아. 양반 맞네. 뒷짐도 져야지.” 하며 친구들은 낄낄거렸다.
남 보기에 양반이라는 멋진 별명을 얻고 나서 그 별명에 걸 맞는 대우와 존경을 받고 행복하게 살았느냐고 묻는다면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등교시간에 조금이라도 지각을 하면 선도 선생으로부터 이런 호령이 떨어졌다. “야 이놈아 옛날 양반들은 약속을 칼같이 지키고 시간을 철석같이 지켰느니라.”  복장이 조금 불량하면 옛날 양반들은 혼자 방안에 있어도 몸을 깨끗이 씻고 의관을 정제하고 정좌로 앉아 있었다며 꿀밤을 맞기 일쑤였다. 내가 생각하기에 양반과 선비를 혼동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선비와 양반은 엄연히 다른데 말이다.
이건 약과였다. 국사시간이 가장 고역이었다. 조선말 세도정치 과목이 나오면 쥐구멍을 찾는 심정이었다. 우리 김 씨가 세도정치로 나라가 망하게 되었다고 단언할 때는 몸 둘 바를 몰랐다. 이럴 때면 아이들은 나를 흘끔거리며 “선생님, 얘 조상인데요.” 하면 선생님은 “엉, 그래?” 하며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웃었다.
그런데 평생 처음으로 별명으로 인해 득을 보는 일이 발생했다.
어느 날 회사에서 전화 한통을 받았다.
“영모냐? 나 65회 동기동창 재목이야, 잘 지내지? 벌써 졸업한 지 꽤 됐지. 보고 싶다야.”
느닷없는 친구의 전화에 학창시절의 그리움들이 밀려오긴 했지만 의아했다. 그리 친한 친구도 아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용건이 있었다. 우리나라 유수의 언론사에 다니는데 이번이 진급 케이스란다.
“실적이 좀 있어야 하는데 우리 언론사에서 거금을 들여 제작한 비단길 다큐멘터리 테이프 한 질 팔아줘야겠다, 몇 질만 팔면 목표달성인데 동창 덕 좀 보자, 친구 좋은 게 뭔데.”
아무리 친구라지만 적은 돈이 아니었다. 안 된다고 딱 자르기엔 혹시 진짜 재목이가 맞다면 냉정하다고 할까봐 확인해 보기로 했다.
“너, 같은 반이었던 용민이 알지?”
“그럼 알고말고. 그 친구 참 맹랑한 놈이었지.”  
“그 친구 별명이 뭐였는지 기억하냐?”
사실 우리 반이었다면, 아니 그 당시 우리학교에 다녔다면 그 녀석 별명을 모를 수는 없었다. 그 친구의 별명은 똥자루였다. 키도 작은데다 통통해서 붙여졌을 테지만 행동도 특이했다.
미대 졸업 후 두루마기에, 긴 머리에, 수염 기르고, 검정고무신 신고 다닌다는 소문을 바람결에 들었다. 기인열전에 천상병, 중광 스님, 이외수와 같은 급의 기인으로 취급 될 만큼 특이한 친군데 그때도 그랬다.
나 같으면 그 별명을 견디지 못해 자퇴까지 할 정도로 고민했을 텐데 그는 화를 내기는커녕 웃으며 다녔다. ‘똥자루’, 거꾸로 하면 뭔지 아니, 루짜똥 중국어잖아. 얼마나 멋져 하면서 오히려 즐겼다.  그래서 그 친구를 모른다면 동창이 아니라는 증거가 될 수 있었다.
“아, 오래 돼서 기억이 가물가물하네.”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얼버무리려고 했다.
“그럴 수도 있겠네. ‘푼수’였잖아. 그래도 생각 안나?”
“맞아, 이제 생각나네, ‘푼수’ 한마디로 웃기는 놈이었지.”
“아닌데, 사실은 똥자루잖아, 거꾸로 하면 루짜똥.”
전화가 갑자기 끊겼다.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통쾌했다. 자동차공장, 조선소에 다니는 친구와 포항 철공장에 다니는 친구들에게도 가짜 친구에게 속지 말라고 연락해 두었다.
며칠 후 조선소 다니는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문제의 그 전화를 받고 똥자루가 누구 별명인지 아느냐고 물으니 두말 않고 끊더라는 소리에 배꼽을 잡고 웃었다.
별명 덕을 본 셈이다. 이제 친구들끼리도 점잖게 직책이나 선생님이라는 호칭으로 부르고, 불리기에는 어딘가 가식적이고 거리감이 느껴진다. 오히려 그 지겹던 별명이 그리워지며, 그때의 별명으로 불리고 싶다

기고자 소개

김영모

난계수필, 울산문학사랑 회원

공단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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