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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의 옛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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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시간
이돈주
이돈주

대전의 옛 이야기

- 탄현(炭峴)의 교훈

한밭의 중요성과 그 지정학적 가치를 알고 성(城)을 많이 쌓은 왕은 백제 동성왕(東城王)이었다. 탄현이 기록에 나타나는 것은 백제 동성왕 23년(서기501)으로 ‘탄현(炭현)에 목책(木柵)을 설치하여 신라에 대비하였다.’는 것이다. 계족산을 시작으로 식장산에 이어지는 산 능선 따라 밀집해 있는 크고 작은 성들이 그것을 말해준다.
서기 660년은 백제가 건국한지 678년이 되는 해였고 의자왕이 즉위한지 20년이 되는 해였다. 그 해 7월 마침내 당군(唐軍) 10만 명이 금강 어구 기벌포(伎伐浦:현재의 장항)를 향해 공격을 개시함과 동시에 김유신(金庾信)이 이끄는 5만의 신라 군사는 탄현을 향해 직공(直攻)으로 윽박질렀다. 이 소식을 들은 의자왕은 여러 신하들에게 그 대책을 물었다. “당군을 먼저 쳐서 먼 곳에서 오느라 피곤한 그들을 일거에 꺾어 버리면 신라군이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고 대들 수 없을 것이오.” 좌평 의직(義直)이 말하였다. “아니요! 멀리서 온 당병은 빨리 싸움을 끝내고 돌아가려 할 것이니, 그 예봉을 꺾기가 힘든 즉 육상으로 쳐들어오는 신라군을 먼저 쳐서 그 예기(銳氣)를 누른 후 당병을 쳐야 하오.” 달솔 상영(常永)의 주장이었다. 왕은 누구의 말을 따를지 몰라 충신으로 유배생활을 하고 있던 흥수(興首)에게 급히 사람을 보내어 의견을 물었다. 흥수는 “당병으로 하여금 백강(白江)에 들어오지 못하게 세심히 준비해 막고, 신라군으로 하여금 탄현을 넘지 못하게 단단히 지켜 막아낸다면 나라를 지킬 수 있다.”고 말했다. 거기에 더해 ‘탄현은 한 대장부의 창 한 자루에 일만 군사가 당해내지 못할 것이니, 마땅히 용맹하고 날랜 군사를 뽑아 꼭 지켜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러나 의자왕과 간신들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유배생활을 하는 그가 왕을 원망하고 있는 게 분명하니, 그 의견 역시 국방을 불리하게 말하는 것이다.’라고 배제하며 묵살하였다.
이에 앞서 탄현이 전략상 요충지임은 백제의 충신 성충(成忠)의 ‘임종상서’에서도 나타난다. 즉, 성충은 의자왕이 정사를 게을리하자 이를 막으려 애써 간하다가 옥에 갇혀, 656년(의자왕 16)에 옥중에서 죽음이 가까워졌음을 알고 왕에게 글을 올리게 되는데, 이 글에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다 하니, 원컨대 한 말씀 드리고 죽고자 합니다. 신은 항상 시세의 변화를 관찰하는데, 반드시 적세를 조기에 늦춰 놓은 뒤에야 가히 나라를 보존할 수 있사오니, 만약 타국의 군대가 쳐들어오면 기필코 전쟁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무릇 군사를 쓸 때에는 그 지리를 살펴 상류에 처하여 적세로는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의 언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 그 험난한 곳에 의거하여 수호하고 방어한 뒤에야 다시 치는 것이 가하겠습니다.’라고 역설하여 탄현이 육로의 요충지임을 짚어 말하였다.
의자왕은 간신들의 아첨하는 말에 이끌려 결국 탄현을 지키지 않고 놓치게 되었다. 그리하여 계백(階伯) 장군으로 하여금 황산(黃山:지금의 연산)에서 적을 맞아 싸우게 하는 어리석은 전략을 세우니 탄현을 수월히 넘은 김유신 군과 백강을 건너온 소정방(蘇定方) 군의 기세 높은 양동작전에 의해 백제 사직(社稷)은 일시에 무너져 버리고, 그 해 7월 18일 백제는 비극적인 종말을 고하고 말았던 것이다. “나라를 보위하려면 탄현을 지키라!”는 동성왕과 충신들의 간절한 외침에 귀를 막고 7세기에 걸쳐 번영을 누렸던 백제 왕국의 멸망을 가져온 역사의 현장-. 아직도 그 때의 성터가 지천한 탄현 주위는 지금도 교통의 요충으로 대전 옥천 간을 잇는 경부고속도로와 철도는 서울과 남쪽을 연결하는 중심 길임을 증명해 준다. 탄현 또는 침현(沈峴)이라고도 하는 이 고개, 역사상의 탄현은 대전광역시 삼정동과 충북 옥천군 군북면 자모리와 접경하고 있는 ‘자모실고개’와 그 아래 세천동에서 옥천으로 넘어가는 ‘마달령(馬達嶺)’으로 비정하기도 하며, 또 하나는 충남 금산군 남이면 소재 백암산의 백령성(栢領城)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탄현이 전략상 요충지임은 분명했고, 백제는 온 힘을 다해 지켜야 했다. 그러나 부실했던 백제의 전략에 신라군은 대전 부근의 탄현을 가벼이 지나 황산벌에서 계백 장군이 거느린 백제의 5천 결사대를 물리치고, 그 당시 백제의 수도였던 사비성(泗沘城:지금의 부여)으로 진격했던 것이다. 대전은 이미 삼국시대에도 교통의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어 현재 우리나라 교통의 중심지임이 우연한 일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역사는 ‘중요한 것은 소홀히 대하지 말라.’는 교훈을 남긴다. 여럿에 의한 상식과 순리 그리고 합리적인 판단에 의한 의사 결정이 필요하다는 게 현대인에도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새겨온다
참고문헌
1972. 한밭승람 : 변평섭 저
1981. 내 고장 한밭 : 최근묵 저
1999. 아름다운 대전8경 : 대전광역시

기고자 소개

이돈주

시인

한국문인협회 서정문학연구위원

대전문인협회 수석부회장

시집 :
『고개를 넘으며』 『숲길에서』 『마음의 길목』 『그림자 동행』 『먼동 트는 새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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