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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지도연구원

대전청소년

2020년 가을호
청소년이 힘들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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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레리 꼴레리

본문

우리들의 시간
강병철
강병철

얼레리 꼴레리

윤기윤 스승님 이름자는 앞으로 부르나 거꾸로 부르나 그대로 윤기윤이다. 방앗간집 셋째 딸 정은정과 서낭당 옴팡집 품팔이네 일곱째 문기문처럼 거문국민학교 전교생 팔백오십 명 중 딱 세 명만 앞뒤로 똑같은 이름자이다. 정은정은 부잣집 딸이니까 졸업하자마자 세라복 입은 여중생으로 변신하겠지만 문기문은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읍내 짜장면집 심부름꾼으로 약조되었다. 멍석도마 깔아놓고 맨손으로 반죽된 떡을 치며 절반씩 뒤집을 때마다 밀가루 회를 재빨리 무친다. 마침내 젓가락처럼 가느다란 짜장 가락 만드는 기술만 익히면 동창생들 모아 중화요리 시식도 시키겠다고 벌써부터 떠벌떠벌 나팔 불고 다닌다.
“엄칭이 싸게 팔 거여.”
아이들이 손가락을 빨기 시작했고 방앗간집 정은정까지 입술 양끝 올리며 미소 짓는 바람에 내 가슴이 싸-해졌다. 내가 초승달 미소가 예쁜 정은정에게 좋아한다는 고백을 죽을 때까지 못할 것이 확실하다. 그 대신 고무줄도 끊지 않고 아이스케키 치마도 당연히 걷어 올리지 않고 그냥 그 앞에서 독서삼매경에 빠지리라. 그랬다. 움푹 팬 옹달샘 눈도 그렁그렁하고 보조개도 예쁘지만 면도칼로 손톱 등을 사각사각 긁어낼 때는 천사처럼 아름답다. 그러니까 나는 소녀가 보는 앞에서 책 읽는 포즈를 석고처럼 연출해야 한다. ‘손오공’이나 ‘걸리버 여행기’도 흥미롭지만 ‘성냥팔이 소녀’가 가장 슬픈 이야기라고 조근조근 전달해주고 싶은 것이다.
스승님은 부잣집 후처가 낳은 외아들 출신이다. 바다로 가는 개울 장금내 마을 초입, 장정 세 명이 팔을 이어도 닿지 못하는 고목나무 아래 기와집이 그 유명한 고래등 지주네 집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윤기윤 스승네 땅을 밟지 않고서는 한머리 땅을 돌아다닐 수가 없을 정도로 떵떵거리는 유지였단다. 소재지 최고의 지주였다가 해방 직후 토지개혁 때 절반 이상을 떼어냈다는 풍문도 귀동냥으로 들었다. 언제부터였나, 그 지주네 후계자 핏줄인 담임님이 밤마다 장금내 징검다리를 건너더라고 했다. 웬일일까. 저물녘마다 물 건너 징검다리 건너 당재골 옴팡집 그 사립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동 트는 여명 어디쯤 다시 스승의 그림자가 신새벽 오솔길 이슬 치며 돌아오곤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옴팡집 투전판에서 새도록 화투패 때리더라고, 일곱째 아들 문기문 선수가 쪼쪼쪼 소문내었다. 부엉이가 울고 개울이 울고 가슴에 논문서 품은 사랑방 문풍지도 칼바람 받아 새도록 울었다던가.
다음날 스승님은 두 시간 지나면 그때부터 자습을 시켰다. 「동아전과」한 페이지를 칠판에 빼곡히 적으신 다음 교단에 대자(大字)로 누워 한낮의 수면에 아늑하게 빠지시는 것이다. 코를 골 때마다 얼굴을 덮은 신문지가 들락펼락하고 더러는 겨울잠 자는 곰처럼 아랫배가 허공으로 올라왔다가 곧바로 바람 빠진 풍선처럼 가라앉곤 했다. 그렇게 마구잡이로 베껴만 쓰면 나머지는 우히히 신나는 자습 시간이다. 나중에는 아예 반장 동만이에게 동아전과를 맡겼으므로 우리들은 타이거마스크나 요괴인간 같은 만화책도 읽고 연필 싸움으로 시간만 때우면 그림자가 서쪽으로 가뿐하게 넘어가는 것이다. 시간이야 어떻든 나는 모른다.
그 늘어졌던 스승의 몸이 기관별 배구시합만 벌어지면 스프링처럼 가벼워졌으니 그 또한 새로운 변신이다. 허공에 붕 뜬 허리가 돌고래처럼 뒤로 제켜졌다가 성성이 긴 팔 뻗어 배구공 내리치면 딱 소리가 담벼락 메아리로 돌아오곤 했다. 중학교 스승들이나 면사무소 공무원 아저씨들, 지서의 순경들까지 스승의 강스파이크에 번번이 맥을 추지 못했다. 공이 상대의 네트에 꽂히자마자 휄 돌아서서 몇 발자국 달리는 시늉으로 한 바퀴 텀블링 재주 선보일 때마다 우리들을 아우성으로 보답했다. 황홀했다.
“윤기윤 선생님이 최고 강스파이크다.”
그러나 그 강 스파이크 손바닥이 우리들의 볼에 번뜩이기도 했다. 떠들거나 기성회비를 가져오지 않아도 때렸고 구구단을 외우지 못해도 솥뚜껑 손바닥이 비행접시처럼 날아왔다. 도장병 종석이는 빨갛게 달아오른 싸대기만 호오호 비벼대며 종례 때까지 구구단 마치려 안간힘이다. 외우는 순서대로 보내므로 끝까지 암송하지 못하면 땅거미 쏟아질 때까지 하굣길이 위태위태하다. 아자자, 죽기살기로 외워야 한다. 치리치리 뼁끼칠, 팔팔이 곰배파리, 약병아리 삐약삐약 스바스바 맞고 외우면서 키도 크고 잠지도 영글었다. 뻐꾹새 울며 아카시아 늘어지는 봄이 지나고 뻐꾹뻐꾹 여름 오면서 외운 만큼 똑똑해지기도 했다. 나는 예순셋 급우 중에 두 번째로 나와 철봉대 붙잡고 서낭당 삼거리까지 동행할 벗을 기다리는 중이다.
대처에서 날아온 한동한 소년, 백설기처럼 새하얀 지서장 아들이 전학 오면서 거꾸로도 똑같은 이름자가 네 명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계집애들 옷맵시가 바뀌기 시작했다. 이상하다. 나이도 한 살 어린 동급생 한동한이 등장하고부터 시골 소녀들 심장 쿵쿵거리는 소리가 나한테까지 들리는 것이다.
‘서울은 매연과 교통지옥에 시달려.’
그런 생뚱한 문장으로 표준말을 썼고 왕자파스로 도화지를 채웠고 운동화 신고 달음박질을 했으니 분명히 족보부터 다른 몸이다. 어쩔 수 없다. 우리들은 이름자를 조합하며 흠집 내기 작전을 폈다. 조조, 기러기, 이효리, 자지 만지자, 자지만 또 만지자, 묵근놈, 장발장, 소주 만병만 주소처럼 모두 앞뒤 쌍둥이다. 얼레리꼴레리. 정은정과 한동한 거꾸로 똑같은 이름자끼리 보리밭에서 주둥이 박치기했다고 담벼락에 써놓고 보리밭에 숨기도 했다. 금정이도 못 되는 은정이한테 ‘성냥팔이 소녀’ 낭송하며 절대로 소통하지 않겠다. 은한이도 못 되는 동한이한테 왕자파스를 절대로 빌리지 않으리라. 부러진 크레용으로 도화지를 채우며 시헐시헐 입술을 훔쳐내었다.
그해 가을이 깊어가면서 억새꽃들이 우우우, 일어서는 중이었다
김춘희

기고자 소개

강병철

성장소설 : 『닭니』 『꽃 피는 부지깽이』 『토메이토와 포테이토』

시집 : 『꽃이 눈물이다』 『호모 중딩사피엔스』 『사랑해요 바보 몽땅』 외

산문집 : 『선생님 울지 마세요』 『쓰뭉선생의 좌충우돌기』 『선생님이 먼저 때렸는데요』 『우리들의 일그러진 성적표』

2001-2010 청소년잡지 『미루』발행인

전 대전충남작가회의 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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